김삼
찬송가의 영향력은 크고 깊다. 상상 이상이다. 때로는 설교 이상의 파워를 발한다. 정서와 직관에의 호소력이 강한 음악 매체로 전달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비록 찬송가 가사는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하지만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구절들이 잠재의식에 미치는 비 진리와 부정적 해악이 있을 때는 문제시 된다.
미국엔 '도시의 전설'(urban legend)이란 게 흔하다. 그 옛날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구수한(?) 고리짝 시골 야담과는 전혀 다른 현대 야담들이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나도는 황당한 풍문을 가리킨다. '믿거나 말거나'(Believe It or Not) 식 미스터리와는 또 다르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행 찬송가 가사들 중에도 성경으로 검증되지 않은 채로 방치된 '전설'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특히 크리스마스 캐럴들이 유난히 그렇다. 우리가 코흘리갯적부터 수십 년 간 애창해 온 해묵은 곡일수록 전설도 뿌리 깊다. 다행히도 찬송가 속 전설의 불꽃은 성경과 대조해 보면 쉽게 꺼트릴 수 있다.
세(3) 동방박사 설(찬송가 116장, 123장4절)은 대표적 사례. 영문 가사는 더하다. 박사들이 '왕'이었다는 설은 성경이나 역사 상으로 확인되지 않은 옛 설화에서 왔다.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에도 박사들은 으레 3명으로 등장한다. 아예 누구누구였다고 구체적으로 이름까지 등장하기도 한다. 성경에는 없는 '라파엘'이란 천사 이름을 등장시킨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에서처럼.
성경기록 상 황금·유향·몰약 세 가지 예물을 드렸다는 단서 때문일텐데, 꼭 세 명이란 보장이 없다. 세 명인지 너덧 명 또는 그 이상인지 성경본문으로는 알 길이 없다. 세 명이었을 수도 있지만 딱히 세 명은 아니다. 예/아니오 가 분명해야 한다.
이쯤이면 "또 그 얘긴가. 제발 좀 따지지 말고 그냥 둘 수 없나?"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찬송가 가사를 성경 같은 지극한 위엄과 권위로 무장된 절대 진리로 믿고 수정 불가 대상으로 삼는 예도 없지 않다. "비본질적인 것을 너무 거들지 말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점(iota) 하나라도 가감할 수 없는 절대진리일진대 성경에서 인용되거나 포함된 글 내용도 성경 그대로여야 하지 않겠나.
찬송가 속 전설은 상상을 중시하는 문학이란 매개체를 빌려 표현되다 보니 발생하기가 더 쉽다. 솔직히, 작시자가 찬송가 가사를 쓸 때 성경 진리와 문학적 상상 사이에 치열한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게다가 작자 자신의 신학적, 사상적 배경과 잠재의식까지도 적지 아니 가세된다. 설상가상으로 영어나 라틴계 언어는 전통시의 운율법(각운·압운법)을 억지로 끼어 맞추다 보니 본의 아니게 엉뚱한 말을 갖다 붙이기 십상이다.
문학적 상상도 좋지만 어디까지나 성경 진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 찬송가가 성경말씀을 담는 진리의 그릇과 생명 전달의 매개체이기 원한다면, 지나치게 부풀린 상상과 전설의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
또 다른 '전설'을 들춰 보자. 흔히 마르틴 루터의 작사로 잘못 알려진 113(114장)의 경우 '육축 소리에 아기 잠 깨나 그 순하신 예수 우시지 않네'로 되어 있다. 언뜻 그럴싸 하지만 입증되지 않은 상상이다. 가축 울음소리에 정말 아기가 깨셨는지는 그냥 두고라도 당시에 우시지 않았음을 어떻게 알고 기정사실화 한 것인가. 엄밀히 말해 가축 소리에 아기가 울었을 수도 안 울었을 수도 있다.
가축소리에 깨어 운다고 해서 순하지 않은 아기인가. 주님의 온유하심은 사실이지만 아기란 태어난 직후부터 자주 울어대는 것이 당연하다. 아기가 내지르는 고고성이 힘찰수록 건강한 것은 아닌가. 이 전설은 양육법이나 아동심리학에도 맞지 않는 얘기다. 또 110장 1절 가사 '어머니의 기도, 아기 우는 소리' 와는 서로 사뭇 어긋맞다.
필자 생각에는 아기가 울었다는 것이 더 인간 예수 답다. 어른 예수도 땅에 계실 때 한없이 우셨다(히5:7). 아기가 순하기 때문에 또는 순하기 위해서는 울지 말아야 한다는 조항이 당시 유대 율법에라도 있었던가. 작자의 상상적 미화작업이 이런 전설을 배태시킨다.
저 유명한 '고요한 밤'(109장)을 보자. 1절 첫 줄을 원문에 가깝게 옮겨 보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모두들 평온하고 환하여라'로 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카톨릭 신부 요젶 모르의 시다. 이 노래도 첫 단추부터 잘못 끼어져 있다. 베틀레헴의 그날 밤은 결코 고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을 역사상 가장 시끄러운 밤이었을 성싶다. 당시 천하로 호적하러 온 사람들 탓이다. 베틀레헴 출신의 본토인들뿐 아니라 해외 유대인들까지 몽땅 몰려 들었으니 얼마나 시끌벅적했겠는가.
해외 유대인들은 수백 년 전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함락될 당시 타국으로 끌려간 이래 이스라엘 주변국과 소아시아와 유럽전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의 후손―소위 흩어진 사람들(디아스포라)이었다. 시간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기사를 보면 당대 유대 디아스포라의 폭을 어림할 수 있다. 파르티아/메디아/엘람/메소포타미아/카파도키아/폰투스/아시아/프리기아/팜필리아/아이귑트/퀴레네/리비아/로마/크레테/아라비아 등에서 골고루 와서 명절 축제에 참가했다.
그런데 예수 탄생 때도 로마제국 치하의 '모든 사람들'이 호적하러 왔다고 했으니 상상해 보라. 이 광대한 지역에 흩어졌던 유대인들 중 인구조사에 응하러 온 베틀레헴 출신들은 죄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그날 밤 이 작은 동네로 한꺼번에 운집해 들어왔다. 집이란 집, 골목이란 골목이 모두 빈틈없이 빼곡이 들어찼을 것이다.
마리아와 요셒이 머물 곳이 없었던 이유가 거기 있다. 그 작은 베틀레헴 시가에 사관(私館) 즉 객사(客舍)가 있다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사관이 있더라도 방이나 코너가 남았을 턱이 없다. 그냥 집 바깥이나 인근의 들에서 묵는 사람들이 숱했을 것이다. 성경학자/고고학자들은 요셒/마리아 커플이 친척들에 밀려 아래 층 구석의 구유 근처에 잠자리를 얻은 것으로 추정한다. 그럼 친척들의 대화소리가 오죽 시끄러웠겠는가.
오래 헤어져 있던 친지, 처음 보는 친척들, 동향 출신들이 서로 어울려 밤새 북적대며 이야기꽃을 피웠을 것이고 포도주로 목을 축여 가며 얘기하느라 취한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다윗 왕가의 본향이었기에 동네는 작지만 출신자들의 자부심과 목청도 작지 않았을 법하다. 혹 서로 잠자리를 비집느라 온갖 타국어로 소리질러가며 다투거나 급기야 같은 타향 출신끼리 뭉쳐 패싸움을 벌이거나 술이 거나하게 취하지나 않았으면 다행일 정도였을 것이다. 아비규환을 이루지는 않았을 망정 '고요한 밤', '평온한 밤'과는 거리가 먼 정경이 아니었을까.
베틀레헴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스라엘 전국은 어떠했겠는가. 아니 로마 제국 전체가 구석구석 통째로 어수선했던 밤이다. 그런 야단법석과 왁자지껄한 소란, 소음의 와중에 마을 어느 한구석을 빌려 마리아가 출산한 것이다. 아기 예수는 이처럼 시끄럽고 죄 많고 절망과 흑암으로 가득 찬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 성경적인 베틀레헴의 그 밤은 이 찬송가의 분위기와는 영 딴 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란 말은 왜 나온 것일까. 알프스 산자락 티롤의 정적 속에 고요히 살아 온 시인 모르 신부의 머리 속에 똥겨진 단순한 문학적 발상이었던 것이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 기도 드릴 때'도 있음직한 일을 그린 것이지 성경 속 실상황은 아니다.
역시 카톨맄 냄새가 짙은 '이새의 뿌리에서'(106장)는 1절 "한 추운 겨울 밤"이란 구절이 또 다른 전설의 뿌리다. 123장 1절(영어원문)도 그렇다. 아기 예수가 오신 그 날은 과연 추운 겨울밤이었을까. 하고많은 좋은 날씨가 있는데 왜 하필 한겨울에 인구조사를 시킨단 말인가.
당시 아우구스투스 옼타비아누스는 비교적 총명한 황제였다. 또 추운 겨울엔 목자들이 들에 머물면서 양을 칠 수가 없다는 게 이스라엘 현지 상식이다. 그러니 '한 추운 겨울밤'의 성탄은 논리상 모순되다. 이같은 모순은 단적으로 고대 로마교회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채택한 결과에서 왔다.
111장의 원문 1절에는 한술 더 떠 '그리스도 우리 구주가 크리스마스에 나셨음을 기억하라'란 문구가 들어 있다. 12월 25일에 오셨다는 말인 셈이다. 그러나 그 날짜에 태어나시지 않았을 뿐더러 태어나신 해도 역사적으로 A.D. 원년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110장 원문 1절은 한글로는 '하늘에는 뭇별'로 옮겨 썼으나 원문은 '하늘엔 별 하나'로 되어 있고 후렴 첫 부분의 '그 별'과 연결된다. 즉 동방박사를 이끈 큰 별을 뜻한다. 그러나 아기 예수가 갓 나셨을 당시 이 별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동방박사들이 온 것은 탄생 후 퍽 한참만의 일이다. 성경은 '아기'(브레포스/눅3:)와 '아이'(파이디온/마2:)라는 서로 다른 낱말로 이를 암시했다. 같은 시차적 모순의 냄새를 풍기는 캐럴은 109장(3절 원문)도 있다. 대부분의 크리스마스카드와 장식에도 탄생 장면과 별이 한데 어우러져 있어 이 같은 전설의 들러리 노릇을 하고 있다.
성탄 캐럴들 원문에는 또 '마구간'(stable)이란 용어가 마구 가고 있다. 111장 가사(존 언더우드 영역)가 그렇다. 119장 1, 2절은 '낮은 마구', '마구간' 등으로 거듭 강조한다. 영어원문은 cattle shed(가축우리), stable(마구간), stall(외양간) 등의 낱말이 총동원됐다. '말구유'(124장)란 말도 그렇다.
4복음서 전체의 실제 탄생기사에는 마구간이란 말이 전혀 없고, '구유' 딱 한 마디 뿐이다. 결국 마구간이란 용어는 '구유'에서 유추된 부산물이다. 주의 천사가 들의 목자들에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표적'이라고 했으므로 이 구유는 목자들이 익히 아는 동굴 속 양 구유였거나 비교적 발견하기 쉬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성경 고고학자의 말을 들어보면, 고대 이스라엘의 구유는 집안이나 길가에 돌, 진흙 등으로 만든 여물통으로 말이 아닌 양떼나 나귀 등의 밥통·물통 역할을 했다. 당대의 말은 왕이나 왕궁의 파발마, 영화 벤허 속에서와 같은 귀족 전차몰이(charioteer)들이 사용할 수 있었고, 마구간은 왕궁이나 귀족의 사저에만 존재했다.
요셒과 마리아가 머문 곳은, 일반 집의 위층 객실(또는 다락)에 손님(특히 친척)들이 꽉 찼으므로 거기 딸린 현관 겸 아래층 한구석의 양 우리였기가 가장 쉽다는 견해에 그리스 원어와 고고학이 힘을 실어주고 있다. 또는 집 부근에 따로 친 장막, 목자용 동굴 속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마구간이었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없다. 마구간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 하기 쉽지만 성경에 밝혀진 '구유'란 낱말로 족해야 한다.
사족일지 모르나 119장의 '낮고 천한 사람과 사귀시며 사셨다'는 문구도 자칫 그릇된 인상을 낳기 쉬운 말이다. 주님이 빈민과 환자, 세리, 창기 등을 돌보신 것도 사실이지만 알고 보면 구분과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대하셨다. 당대의 상류층인 산헤드린 공회원 니고데모, 거부 아리마대 요셒, 부호이자 공무원인 자캐우스, 유대교 유지인 회당장과 로마군 백부장의 집안사람들도 주님은 돌아보셨다. 주님과 제자들에게 마지막 만찬자리를 제공한 마가 요한의 어머니만 해도 120성도가 한꺼번에 여러 날 머물 수 있는 큰 다락방(객실)이 딸린 저택의 소유자였다.
전설 따라 흐르지 말자. 성경 말씀이 가는 곳까지 가고 머문 데서 머물자. 찬송가의 전설들은 과감히 정리되어야 한다. 분명히 진실이 아닌데도 "곡조가 좋은데" 하고 적당히 간과하고 방관하는 '눈 가리고 아옹' 격이 더 이상 되지 말자.
찬송가의 영향력은 크고 깊다. 상상 이상이다. 때로는 설교 이상의 파워를 발한다. 정서와 직관에의 호소력이 강한 음악 매체로 전달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비록 찬송가 가사는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하지만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구절들이 잠재의식에 미치는 비 진리와 부정적 해악이 있을 때는 문제시 된다.
미국엔 '도시의 전설'(urban legend)이란 게 흔하다. 그 옛날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구수한(?) 고리짝 시골 야담과는 전혀 다른 현대 야담들이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나도는 황당한 풍문을 가리킨다. '믿거나 말거나'(Believe It or Not) 식 미스터리와는 또 다르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행 찬송가 가사들 중에도 성경으로 검증되지 않은 채로 방치된 '전설'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특히 크리스마스 캐럴들이 유난히 그렇다. 우리가 코흘리갯적부터 수십 년 간 애창해 온 해묵은 곡일수록 전설도 뿌리 깊다. 다행히도 찬송가 속 전설의 불꽃은 성경과 대조해 보면 쉽게 꺼트릴 수 있다.
세(3) 동방박사 설(찬송가 116장, 123장4절)은 대표적 사례. 영문 가사는 더하다. 박사들이 '왕'이었다는 설은 성경이나 역사 상으로 확인되지 않은 옛 설화에서 왔다.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에도 박사들은 으레 3명으로 등장한다. 아예 누구누구였다고 구체적으로 이름까지 등장하기도 한다. 성경에는 없는 '라파엘'이란 천사 이름을 등장시킨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에서처럼.
성경기록 상 황금·유향·몰약 세 가지 예물을 드렸다는 단서 때문일텐데, 꼭 세 명이란 보장이 없다. 세 명인지 너덧 명 또는 그 이상인지 성경본문으로는 알 길이 없다. 세 명이었을 수도 있지만 딱히 세 명은 아니다. 예/아니오 가 분명해야 한다.
이쯤이면 "또 그 얘긴가. 제발 좀 따지지 말고 그냥 둘 수 없나?"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찬송가 가사를 성경 같은 지극한 위엄과 권위로 무장된 절대 진리로 믿고 수정 불가 대상으로 삼는 예도 없지 않다. "비본질적인 것을 너무 거들지 말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점(iota) 하나라도 가감할 수 없는 절대진리일진대 성경에서 인용되거나 포함된 글 내용도 성경 그대로여야 하지 않겠나.
찬송가 속 전설은 상상을 중시하는 문학이란 매개체를 빌려 표현되다 보니 발생하기가 더 쉽다. 솔직히, 작시자가 찬송가 가사를 쓸 때 성경 진리와 문학적 상상 사이에 치열한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게다가 작자 자신의 신학적, 사상적 배경과 잠재의식까지도 적지 아니 가세된다. 설상가상으로 영어나 라틴계 언어는 전통시의 운율법(각운·압운법)을 억지로 끼어 맞추다 보니 본의 아니게 엉뚱한 말을 갖다 붙이기 십상이다.
문학적 상상도 좋지만 어디까지나 성경 진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 찬송가가 성경말씀을 담는 진리의 그릇과 생명 전달의 매개체이기 원한다면, 지나치게 부풀린 상상과 전설의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
또 다른 '전설'을 들춰 보자. 흔히 마르틴 루터의 작사로 잘못 알려진 113(114장)의 경우 '육축 소리에 아기 잠 깨나 그 순하신 예수 우시지 않네'로 되어 있다. 언뜻 그럴싸 하지만 입증되지 않은 상상이다. 가축 울음소리에 정말 아기가 깨셨는지는 그냥 두고라도 당시에 우시지 않았음을 어떻게 알고 기정사실화 한 것인가. 엄밀히 말해 가축 소리에 아기가 울었을 수도 안 울었을 수도 있다.
가축소리에 깨어 운다고 해서 순하지 않은 아기인가. 주님의 온유하심은 사실이지만 아기란 태어난 직후부터 자주 울어대는 것이 당연하다. 아기가 내지르는 고고성이 힘찰수록 건강한 것은 아닌가. 이 전설은 양육법이나 아동심리학에도 맞지 않는 얘기다. 또 110장 1절 가사 '어머니의 기도, 아기 우는 소리' 와는 서로 사뭇 어긋맞다.
필자 생각에는 아기가 울었다는 것이 더 인간 예수 답다. 어른 예수도 땅에 계실 때 한없이 우셨다(히5:7). 아기가 순하기 때문에 또는 순하기 위해서는 울지 말아야 한다는 조항이 당시 유대 율법에라도 있었던가. 작자의 상상적 미화작업이 이런 전설을 배태시킨다.
저 유명한 '고요한 밤'(109장)을 보자. 1절 첫 줄을 원문에 가깝게 옮겨 보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모두들 평온하고 환하여라'로 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카톨릭 신부 요젶 모르의 시다. 이 노래도 첫 단추부터 잘못 끼어져 있다. 베틀레헴의 그날 밤은 결코 고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을 역사상 가장 시끄러운 밤이었을 성싶다. 당시 천하로 호적하러 온 사람들 탓이다. 베틀레헴 출신의 본토인들뿐 아니라 해외 유대인들까지 몽땅 몰려 들었으니 얼마나 시끌벅적했겠는가.
해외 유대인들은 수백 년 전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함락될 당시 타국으로 끌려간 이래 이스라엘 주변국과 소아시아와 유럽전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의 후손―소위 흩어진 사람들(디아스포라)이었다. 시간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기사를 보면 당대 유대 디아스포라의 폭을 어림할 수 있다. 파르티아/메디아/엘람/메소포타미아/카파도키아/폰투스/아시아/프리기아/팜필리아/아이귑트/퀴레네/리비아/로마/크레테/아라비아 등에서 골고루 와서 명절 축제에 참가했다.
그런데 예수 탄생 때도 로마제국 치하의 '모든 사람들'이 호적하러 왔다고 했으니 상상해 보라. 이 광대한 지역에 흩어졌던 유대인들 중 인구조사에 응하러 온 베틀레헴 출신들은 죄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그날 밤 이 작은 동네로 한꺼번에 운집해 들어왔다. 집이란 집, 골목이란 골목이 모두 빈틈없이 빼곡이 들어찼을 것이다.
마리아와 요셒이 머물 곳이 없었던 이유가 거기 있다. 그 작은 베틀레헴 시가에 사관(私館) 즉 객사(客舍)가 있다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사관이 있더라도 방이나 코너가 남았을 턱이 없다. 그냥 집 바깥이나 인근의 들에서 묵는 사람들이 숱했을 것이다. 성경학자/고고학자들은 요셒/마리아 커플이 친척들에 밀려 아래 층 구석의 구유 근처에 잠자리를 얻은 것으로 추정한다. 그럼 친척들의 대화소리가 오죽 시끄러웠겠는가.
오래 헤어져 있던 친지, 처음 보는 친척들, 동향 출신들이 서로 어울려 밤새 북적대며 이야기꽃을 피웠을 것이고 포도주로 목을 축여 가며 얘기하느라 취한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다윗 왕가의 본향이었기에 동네는 작지만 출신자들의 자부심과 목청도 작지 않았을 법하다. 혹 서로 잠자리를 비집느라 온갖 타국어로 소리질러가며 다투거나 급기야 같은 타향 출신끼리 뭉쳐 패싸움을 벌이거나 술이 거나하게 취하지나 않았으면 다행일 정도였을 것이다. 아비규환을 이루지는 않았을 망정 '고요한 밤', '평온한 밤'과는 거리가 먼 정경이 아니었을까.
베틀레헴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스라엘 전국은 어떠했겠는가. 아니 로마 제국 전체가 구석구석 통째로 어수선했던 밤이다. 그런 야단법석과 왁자지껄한 소란, 소음의 와중에 마을 어느 한구석을 빌려 마리아가 출산한 것이다. 아기 예수는 이처럼 시끄럽고 죄 많고 절망과 흑암으로 가득 찬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 성경적인 베틀레헴의 그 밤은 이 찬송가의 분위기와는 영 딴 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란 말은 왜 나온 것일까. 알프스 산자락 티롤의 정적 속에 고요히 살아 온 시인 모르 신부의 머리 속에 똥겨진 단순한 문학적 발상이었던 것이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 기도 드릴 때'도 있음직한 일을 그린 것이지 성경 속 실상황은 아니다.
역시 카톨맄 냄새가 짙은 '이새의 뿌리에서'(106장)는 1절 "한 추운 겨울 밤"이란 구절이 또 다른 전설의 뿌리다. 123장 1절(영어원문)도 그렇다. 아기 예수가 오신 그 날은 과연 추운 겨울밤이었을까. 하고많은 좋은 날씨가 있는데 왜 하필 한겨울에 인구조사를 시킨단 말인가.
당시 아우구스투스 옼타비아누스는 비교적 총명한 황제였다. 또 추운 겨울엔 목자들이 들에 머물면서 양을 칠 수가 없다는 게 이스라엘 현지 상식이다. 그러니 '한 추운 겨울밤'의 성탄은 논리상 모순되다. 이같은 모순은 단적으로 고대 로마교회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채택한 결과에서 왔다.
111장의 원문 1절에는 한술 더 떠 '그리스도 우리 구주가 크리스마스에 나셨음을 기억하라'란 문구가 들어 있다. 12월 25일에 오셨다는 말인 셈이다. 그러나 그 날짜에 태어나시지 않았을 뿐더러 태어나신 해도 역사적으로 A.D. 원년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110장 원문 1절은 한글로는 '하늘에는 뭇별'로 옮겨 썼으나 원문은 '하늘엔 별 하나'로 되어 있고 후렴 첫 부분의 '그 별'과 연결된다. 즉 동방박사를 이끈 큰 별을 뜻한다. 그러나 아기 예수가 갓 나셨을 당시 이 별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동방박사들이 온 것은 탄생 후 퍽 한참만의 일이다. 성경은 '아기'(브레포스/눅3:)와 '아이'(파이디온/마2:)라는 서로 다른 낱말로 이를 암시했다. 같은 시차적 모순의 냄새를 풍기는 캐럴은 109장(3절 원문)도 있다. 대부분의 크리스마스카드와 장식에도 탄생 장면과 별이 한데 어우러져 있어 이 같은 전설의 들러리 노릇을 하고 있다.
성탄 캐럴들 원문에는 또 '마구간'(stable)이란 용어가 마구 가고 있다. 111장 가사(존 언더우드 영역)가 그렇다. 119장 1, 2절은 '낮은 마구', '마구간' 등으로 거듭 강조한다. 영어원문은 cattle shed(가축우리), stable(마구간), stall(외양간) 등의 낱말이 총동원됐다. '말구유'(124장)란 말도 그렇다.
4복음서 전체의 실제 탄생기사에는 마구간이란 말이 전혀 없고, '구유' 딱 한 마디 뿐이다. 결국 마구간이란 용어는 '구유'에서 유추된 부산물이다. 주의 천사가 들의 목자들에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표적'이라고 했으므로 이 구유는 목자들이 익히 아는 동굴 속 양 구유였거나 비교적 발견하기 쉬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성경 고고학자의 말을 들어보면, 고대 이스라엘의 구유는 집안이나 길가에 돌, 진흙 등으로 만든 여물통으로 말이 아닌 양떼나 나귀 등의 밥통·물통 역할을 했다. 당대의 말은 왕이나 왕궁의 파발마, 영화 벤허 속에서와 같은 귀족 전차몰이(charioteer)들이 사용할 수 있었고, 마구간은 왕궁이나 귀족의 사저에만 존재했다.
요셒과 마리아가 머문 곳은, 일반 집의 위층 객실(또는 다락)에 손님(특히 친척)들이 꽉 찼으므로 거기 딸린 현관 겸 아래층 한구석의 양 우리였기가 가장 쉽다는 견해에 그리스 원어와 고고학이 힘을 실어주고 있다. 또는 집 부근에 따로 친 장막, 목자용 동굴 속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마구간이었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없다. 마구간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 하기 쉽지만 성경에 밝혀진 '구유'란 낱말로 족해야 한다.
사족일지 모르나 119장의 '낮고 천한 사람과 사귀시며 사셨다'는 문구도 자칫 그릇된 인상을 낳기 쉬운 말이다. 주님이 빈민과 환자, 세리, 창기 등을 돌보신 것도 사실이지만 알고 보면 구분과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대하셨다. 당대의 상류층인 산헤드린 공회원 니고데모, 거부 아리마대 요셒, 부호이자 공무원인 자캐우스, 유대교 유지인 회당장과 로마군 백부장의 집안사람들도 주님은 돌아보셨다. 주님과 제자들에게 마지막 만찬자리를 제공한 마가 요한의 어머니만 해도 120성도가 한꺼번에 여러 날 머물 수 있는 큰 다락방(객실)이 딸린 저택의 소유자였다.
전설 따라 흐르지 말자. 성경 말씀이 가는 곳까지 가고 머문 데서 머물자. 찬송가의 전설들은 과감히 정리되어야 한다. 분명히 진실이 아닌데도 "곡조가 좋은데" 하고 적당히 간과하고 방관하는 '눈 가리고 아옹' 격이 더 이상 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