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3일 월요일
무엇이 진짜 거룩한 음악인가?
거룩의 개념은 전통음악/CCM 같은 형식으로 설정되지 않는다
김삼
많은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 '거룩'의 개념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런 것을 상상의 거룩, 관념 상 또는 감각 상의 거룩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모든 감관들 중 시각이 가장 밝기 때문에 겉 모습이나 어떤 형식이 점잖게 보일 때 "경건하다", "거룩하다"고 표현하기 십상이다.
예를 들어 성경적 또는 기독교적 주제나 가사 또는 비슷한 분위기의 테마를 사용한 음악이나 카톨맄/유대교 음악 등 종교음악 장르의 작품들을 통째로 모두 '거룩한 음악'이라고 지칭하려 든다. 그렇다면, 멘델스존의 교향곡 '개혁'이나 말러의 '부활' 교향곡, 쉔베르크의 '시편 130' 등이 거룩한가, 않은가? 확답이 어려운가?
불가지론자 가브리엘 다눈지오의 극본 '생 세바스티엥의 순교'에 갖다 붙인 자연신론자 드뷔시의 '순교자'는 어떤가? 이런 답은 퍽 쉬울 것이다.
또 확실한 기독교 주제의 음악을 누구나 연주한다고 다 거룩한 음악이라 할 수 있겠는가? 가령 유대교인들이 핸델의 '메시아'를 연주한다면, 거룩한가? 또는 연주 장소가 교회당 또는 성당이라고 해서 거룩하다, 성스럽다고 할 수 있는가?
교회 안에서도 그렇다. '거룩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들을 한다. 현대의 교회당을 '성전'이라느니 강단이나 제대, 주례 장소를 "거룩하다"며 따로 구분해 놓고 어린이금지구역을 삼는 일 등이 그렇다. 사실 어린이는 어떤 어른들보다 더 거룩할 수도 있다!
성령이 충만하던 초기교회에서도 그런 일은 흔했다. 초기 교회 안내위원들이 겉 모습으로 사람 차별하다가 사도 파울에게 외모로 교인 차별하지 말라는 강력한 책망을 들은 예로 보아 알 수 있다.
겉 모습과 표면 차원의 이런 '거룩' 개념은 교회를 죄인들을 초청하는 장소가 아니라 정반대로 죄인을 내쫓는 장소로 만드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언젠가 소위 '재건파'에 속한 어느 장로교회를 방문했다가 "생리 중인 여성도는 주일날 교회에 오면 안 된다"는 얘기를 공공연히 하는 것을 듣고 놀란 적이 있다. 가히 이단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교회는 죄인들이 거듭나서 된 성도가 모이는 장소이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다. 시초부터 거룩했던 자들의 모임이 아니다. 그런 곳에서 표면상의 거룩 개념만으로 사람을 차별하다 보면 죄인들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거룩의 개념은 결코 인간이 설정하지 않는다.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설정된다. 스스로 '거룩한 분'(Holy One)이시며 '거룩케 하시는 분'(야훼메카데쉬)이신 하나님은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서도 거룩하게 하시며 신약/교회시대엔 성령으로 오셨다. 성령님 자신이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이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난 자는 이미 거룩케 됐으나 더 거룩케 되기 위하여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늘 필요하다.
내용이 아닌 형식을 갖고 거룩하다 아니다를 판단하는 경우는 한때 전통적 고전적 교회음악과 CCM을 차별하던 경우에서도 명약 관화해진다. "CCM은 교회음악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식의 말은 CCM은 거룩하지 않고 부정하니 교회음악의 반열에 설 수 없다는 말과 과히 다른 말이 아니다.
CCM의 이디엄/미디엄이 통속적이므로 천하게 보이니까 덜 거룩해 보이거나 아예 거룩하지 않게 보인다는 발상에서일 것이다. 그런 말 속에는 전통음악만 거룩할 수 있고 교회음악의 반열에 서서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개념이 은근히 포함돼 있다. 바로 이런 것이 상상의 거룩, 감각 상의 거룩이다. 영적인 거룩이 아니다.
또 교회에서마다 CCM의 위치가 강화돼 가는 요즘은 CCM은 거룩하고 고전적인 교회음악은 거룩성이 떨어진다는 인식도 덩달아 강화돼 간다. 과연 그럴까?
음악은 오로지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을 때만 거룩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의 어떤 경우도 함부로 "거룩하다" "거룩하지 않다"를 논할 수 없다. 심지어 거듭난 자들만 모여 연주한다고 해도 거룩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 그런 사례를 봤기 때문에 하는 얘기다. 그리고 거룩의 개념은 전통음악과 CCM 같은 형식으로 결코 설정되지 않는다.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는 전통음악인들도 얼마든지 속으로 악을 저지르며 위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제사장들에게 사용된 거룩한 기름은 기름 자체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거룩케 해서 거룩해진 기름이었다. '성가대'는 거룩한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어야 하건만 중세교회 성가대는 귀족 계급의 일부로서 타락한 성가대였다. 형식이 거룩성을 부여해 주지 않음을 웅변해 주는 대목이다.
오로지 하늘의 기름부음을 받는 음악만이 거룩한 음악이다. 이런 거룩의 개념이 바로 이해되는 바탕 위에서 교회음악의 진로를 논할 수 있다. 음악의 거룩함은 죄인들이 그것을 듣고 눈물로 통회하거나 가슴을 치며, 손을 들고 입으로 고백하며 회개하고 거듭나고 다윋이 연주할 때처럼 질병이 낫고, 교회가 성령으로 부흥되는 역사를 통해서 나타날 수 있다.
성령은 주님을 증언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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