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6일 목요일

걸러내야 할 성탄 찬송가 속 전설들


김삼


찬송가의 영향력은 크고 깊다. 상상 이상이다. 때로는 설교 이상의 파워를 발한다. 정서와 직관에의 호소력이 강한 음악 매체로 전달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비록 찬송가 가사는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하지만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구절들이 잠재의식에 미치는 비 진리와 부정적 해악이 있을 때는 문제시 된다.

미국엔 '도시의 전설'(urban legend)이란 게 흔하다. 그 옛날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구수한(?) 고리짝 시골 야담과는 전혀 다른 현대 야담들이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나도는 황당한 풍문을 가리킨다. '믿거나 말거나'(Believe It or Not) 식 미스터리와는 또 다르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행 찬송가 가사들 중에도 성경으로 검증되지 않은 채로 방치된 '전설'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특히 크리스마스 캐럴들이 유난히 그렇다. 우리가 코흘리갯적부터 수십 년 간 애창해 온 해묵은 곡일수록 전설도 뿌리 깊다. 다행히도 찬송가 속 전설의 불꽃은 성경과 대조해 보면 쉽게 꺼트릴 수 있다.

세(3) 동방박사 설(찬송가 116장, 123장4절)은 대표적 사례. 영문 가사는 더하다. 박사들이 '왕'이었다는 설은 성경이나 역사 상으로 확인되지 않은 옛 설화에서 왔다.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에도 박사들은 으레 3명으로 등장한다. 아예 누구누구였다고 구체적으로 이름까지 등장하기도 한다. 성경에는 없는 '라파엘'이란 천사 이름을 등장시킨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에서처럼.

성경기록 상 황금·유향·몰약 세 가지 예물을 드렸다는 단서 때문일텐데, 꼭 세 명이란 보장이 없다. 세 명인지 너덧 명 또는 그 이상인지 성경본문으로는 알 길이 없다. 세 명이었을 수도 있지만 딱히 세 명은 아니다. 예/아니오 가 분명해야 한다.
이쯤이면 "또 그 얘긴가. 제발 좀 따지지 말고 그냥 둘 수 없나?"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찬송가 가사를 성경 같은 지극한 위엄과 권위로 무장된 절대 진리로 믿고 수정 불가 대상으로 삼는 예도 없지 않다. "비본질적인 것을 너무 거들지 말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점(iota) 하나라도 가감할 수 없는 절대진리일진대 성경에서 인용되거나 포함된 글 내용도 성경 그대로여야 하지 않겠나.

찬송가 속 전설은 상상을 중시하는 문학이란 매개체를 빌려 표현되다 보니 발생하기가 더 쉽다. 솔직히, 작시자가 찬송가 가사를 쓸 때 성경 진리와 문학적 상상 사이에 치열한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게다가 작자 자신의 신학적, 사상적 배경과 잠재의식까지도 적지 아니 가세된다. 설상가상으로 영어나 라틴계 언어는 전통시의 운율법(각운·압운법)을 억지로 끼어 맞추다 보니 본의 아니게 엉뚱한 말을 갖다 붙이기 십상이다.
문학적 상상도 좋지만 어디까지나 성경 진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 찬송가가 성경말씀을 담는 진리의 그릇과 생명 전달의 매개체이기 원한다면, 지나치게 부풀린 상상과 전설의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

또 다른 '전설'을 들춰 보자. 흔히 마르틴 루터의 작사로 잘못 알려진 113(114장)의 경우 '육축 소리에 아기 잠 깨나 그 순하신 예수 우시지 않네'로 되어 있다. 언뜻 그럴싸 하지만 입증되지 않은 상상이다. 가축 울음소리에 정말 아기가 깨셨는지는 그냥 두고라도 당시에 우시지 않았음을 어떻게 알고 기정사실화 한 것인가. 엄밀히 말해 가축 소리에 아기가 울었을 수도 안 울었을 수도 있다.
가축소리에 깨어 운다고 해서 순하지 않은 아기인가. 주님의 온유하심은 사실이지만 아기란 태어난 직후부터 자주 울어대는 것이 당연하다. 아기가 내지르는 고고성이 힘찰수록 건강한 것은 아닌가. 이 전설은 양육법이나 아동심리학에도 맞지 않는 얘기다. 또 110장 1절 가사 '어머니의 기도, 아기 우는 소리' 와는 서로 사뭇 어긋맞다.
필자 생각에는 아기가 울었다는 것이 더 인간 예수 답다. 어른 예수도 땅에 계실 때 한없이 우셨다(히5:7). 아기가 순하기 때문에 또는 순하기 위해서는 울지 말아야 한다는 조항이 당시 유대 율법에라도 있었던가. 작자의 상상적 미화작업이 이런 전설을 배태시킨다.

저 유명한 '고요한 밤'(109장)을 보자. 1절 첫 줄을 원문에 가깝게 옮겨 보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모두들 평온하고 환하여라'로 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카톨릭 신부 요젶 모르의 시다. 이 노래도 첫 단추부터 잘못 끼어져 있다. 베틀레헴의 그날 밤은 결코 고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을 역사상 가장 시끄러운 밤이었을 성싶다. 당시 천하로 호적하러 온 사람들 탓이다. 베틀레헴 출신의 본토인들뿐 아니라 해외 유대인들까지 몽땅 몰려 들었으니 얼마나 시끌벅적했겠는가.

해외 유대인들은 수백 년 전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함락될 당시 타국으로 끌려간 이래 이스라엘 주변국과 소아시아와 유럽전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의 후손―소위 흩어진 사람들(디아스포라)이었다. 시간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기사를 보면 당대 유대 디아스포라의 폭을 어림할 수 있다. 파르티아/메디아/엘람/메소포타미아/카파도키아/폰투스/아시아/프리기아/팜필리아/아이귑트/퀴레네/리비아/로마/크레테/아라비아 등에서 골고루 와서 명절 축제에 참가했다.

그런데 예수 탄생 때도 로마제국 치하의 '모든 사람들'이 호적하러 왔다고 했으니 상상해 보라. 이 광대한 지역에 흩어졌던 유대인들 중 인구조사에 응하러 온 베틀레헴 출신들은 죄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그날 밤 이 작은 동네로 한꺼번에 운집해 들어왔다. 집이란 집, 골목이란 골목이 모두 빈틈없이 빼곡이 들어찼을 것이다.

마리아와 요셒이 머물 곳이 없었던 이유가 거기 있다. 그 작은 베틀레헴 시가에 사관(私館) 즉 객사(客舍)가 있다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사관이 있더라도 방이나 코너가 남았을 턱이 없다. 그냥 집 바깥이나 인근의 들에서 묵는 사람들이 숱했을 것이다. 성경학자/고고학자들은 요셒/마리아 커플이 친척들에 밀려 아래 층 구석의 구유 근처에 잠자리를 얻은 것으로 추정한다. 그럼 친척들의 대화소리가 오죽 시끄러웠겠는가.

오래 헤어져 있던 친지, 처음 보는 친척들, 동향 출신들이 서로 어울려 밤새 북적대며 이야기꽃을 피웠을 것이고 포도주로 목을 축여 가며 얘기하느라 취한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다윗 왕가의 본향이었기에 동네는 작지만 출신자들의 자부심과 목청도 작지 않았을 법하다. 혹 서로 잠자리를 비집느라 온갖 타국어로 소리질러가며 다투거나 급기야 같은 타향 출신끼리 뭉쳐 패싸움을 벌이거나 술이 거나하게 취하지나 않았으면 다행일 정도였을 것이다. 아비규환을 이루지는 않았을 망정 '고요한 밤', '평온한 밤'과는 거리가 먼 정경이 아니었을까.

베틀레헴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스라엘 전국은 어떠했겠는가. 아니 로마 제국 전체가 구석구석 통째로 어수선했던 밤이다. 그런 야단법석과 왁자지껄한 소란, 소음의 와중에 마을 어느 한구석을 빌려 마리아가 출산한 것이다. 아기 예수는 이처럼 시끄럽고 죄 많고 절망과 흑암으로 가득 찬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 성경적인 베틀레헴의 그 밤은 이 찬송가의 분위기와는 영 딴 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란 말은 왜 나온 것일까. 알프스 산자락 티롤의 정적 속에 고요히 살아 온 시인 모르 신부의 머리 속에 똥겨진 단순한 문학적 발상이었던 것이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 기도 드릴 때'도 있음직한 일을 그린 것이지 성경 속 실상황은 아니다.

역시 카톨맄 냄새가 짙은 '이새의 뿌리에서'(106장)는 1절 "한 추운 겨울 밤"이란 구절이 또 다른 전설의 뿌리다. 123장 1절(영어원문)도 그렇다. 아기 예수가 오신 그 날은 과연 추운 겨울밤이었을까. 하고많은 좋은 날씨가 있는데 왜 하필 한겨울에 인구조사를 시킨단 말인가.
당시 아우구스투스 옼타비아누스는 비교적 총명한 황제였다. 또 추운 겨울엔 목자들이 들에 머물면서 양을 칠 수가 없다는 게 이스라엘 현지 상식이다. 그러니 '한 추운 겨울밤'의 성탄은 논리상 모순되다. 이같은 모순은 단적으로 고대 로마교회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채택한 결과에서 왔다.

111장의 원문 1절에는 한술 더 떠 '그리스도 우리 구주가 크리스마스에 나셨음을 기억하라'란 문구가 들어 있다. 12월 25일에 오셨다는 말인 셈이다. 그러나 그 날짜에 태어나시지 않았을 뿐더러 태어나신 해도 역사적으로 A.D. 원년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110장 원문 1절은 한글로는 '하늘에는 뭇별'로 옮겨 썼으나 원문은 '하늘엔 별 하나'로 되어 있고 후렴 첫 부분의 '그 별'과 연결된다. 즉 동방박사를 이끈 큰 별을 뜻한다. 그러나 아기 예수가 갓 나셨을 당시 이 별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동방박사들이 온 것은 탄생 후 퍽 한참만의 일이다. 성경은 '아기'(브레포스/눅3:)와 '아이'(파이디온/마2:)라는 서로 다른 낱말로 이를 암시했다. 같은 시차적 모순의 냄새를 풍기는 캐럴은 109장(3절 원문)도 있다. 대부분의 크리스마스카드와 장식에도 탄생 장면과 별이 한데 어우러져 있어 이 같은 전설의 들러리 노릇을 하고 있다.

성탄 캐럴들 원문에는 또 '마구간'(stable)이란 용어가 마구 가고 있다. 111장 가사(존 언더우드 영역)가 그렇다. 119장 1, 2절은 '낮은 마구', '마구간' 등으로 거듭 강조한다. 영어원문은 cattle shed(가축우리), stable(마구간), stall(외양간) 등의 낱말이 총동원됐다. '말구유'(124장)란 말도 그렇다.

4복음서 전체의 실제 탄생기사에는 마구간이란 말이 전혀 없고, '구유' 딱 한 마디 뿐이다. 결국 마구간이란 용어는 '구유'에서 유추된 부산물이다. 주의 천사가 들의 목자들에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표적'이라고 했으므로 이 구유는 목자들이 익히 아는 동굴 속 양 구유였거나 비교적 발견하기 쉬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성경 고고학자의 말을 들어보면, 고대 이스라엘의 구유는 집안이나 길가에 돌, 진흙 등으로 만든 여물통으로 말이 아닌 양떼나 나귀 등의 밥통·물통 역할을 했다. 당대의 말은 왕이나 왕궁의 파발마, 영화 벤허 속에서와 같은 귀족 전차몰이(charioteer)들이 사용할 수 있었고, 마구간은 왕궁이나 귀족의 사저에만 존재했다.

요셒과 마리아가 머문 곳은, 일반 집의 위층 객실(또는 다락)에 손님(특히 친척)들이 꽉 찼으므로 거기 딸린 현관 겸 아래층 한구석의 양 우리였기가 가장 쉽다는 견해에 그리스 원어와 고고학이 힘을 실어주고 있다. 또는 집 부근에 따로 친 장막, 목자용 동굴 속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마구간이었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없다. 마구간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 하기 쉽지만 성경에 밝혀진 '구유'란 낱말로 족해야 한다.

사족일지 모르나 119장의 '낮고 천한 사람과 사귀시며 사셨다'는 문구도 자칫 그릇된 인상을 낳기 쉬운 말이다. 주님이 빈민과 환자, 세리, 창기 등을 돌보신 것도 사실이지만 알고 보면 구분과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대하셨다. 당대의 상류층인 산헤드린 공회원 니고데모, 거부 아리마대 요셒, 부호이자 공무원인 자캐우스, 유대교 유지인 회당장과 로마군 백부장의 집안사람들도 주님은 돌아보셨다. 주님과 제자들에게 마지막 만찬자리를 제공한 마가 요한의 어머니만 해도 120성도가 한꺼번에 여러 날 머물 수 있는 큰 다락방(객실)이 딸린 저택의 소유자였다.

전설 따라 흐르지 말자. 성경 말씀이 가는 곳까지 가고 머문 데서 머물자. 찬송가의 전설들은 과감히 정리되어야 한다. 분명히 진실이 아닌데도 "곡조가 좋은데" 하고 적당히 간과하고 방관하는 '눈 가리고 아옹' 격이 더 이상 되지 말자.

2007년 12월 3일 월요일

무엇이 진짜 거룩한 음악인가?


거룩의 개념은 전통음악/CCM 같은 형식으로 설정되지 않는다

김삼


많은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 '거룩'의 개념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런 것을 상상의 거룩, 관념 상 또는 감각 상의 거룩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모든 감관들 중 시각이 가장 밝기 때문에 겉 모습이나 어떤 형식이 점잖게 보일 때 "경건하다", "거룩하다"고 표현하기 십상이다.

예를 들어 성경적 또는 기독교적 주제나 가사 또는 비슷한 분위기의 테마를 사용한 음악이나 카톨맄/유대교 음악 등 종교음악 장르의 작품들을 통째로 모두 '거룩한 음악'이라고 지칭하려 든다. 그렇다면, 멘델스존의 교향곡 '개혁'이나 말러의 '부활' 교향곡, 쉔베르크의 '시편 130' 등이 거룩한가, 않은가? 확답이 어려운가?

불가지론자 가브리엘 다눈지오의 극본 '생 세바스티엥의 순교'에 갖다 붙인 자연신론자 드뷔시의 '순교자'는 어떤가? 이런 답은 퍽 쉬울 것이다.

또 확실한 기독교 주제의 음악을 누구나 연주한다고 다 거룩한 음악이라 할 수 있겠는가? 가령 유대교인들이 핸델의 '메시아'를 연주한다면, 거룩한가? 또는 연주 장소가 교회당 또는 성당이라고 해서 거룩하다, 성스럽다고 할 수 있는가?

교회 안에서도 그렇다. '거룩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들을 한다. 현대의 교회당을 '성전'이라느니 강단이나 제대, 주례 장소를 "거룩하다"며 따로 구분해 놓고 어린이금지구역을 삼는 일 등이 그렇다. 사실 어린이는 어떤 어른들보다 더 거룩할 수도 있다!

성령이 충만하던 초기교회에서도 그런 일은 흔했다. 초기 교회 안내위원들이 겉 모습으로 사람 차별하다가 사도 파울에게 외모로 교인 차별하지 말라는 강력한 책망을 들은 예로 보아 알 수 있다.

겉 모습과 표면 차원의 이런 '거룩' 개념은 교회를 죄인들을 초청하는 장소가 아니라 정반대로 죄인을 내쫓는 장소로 만드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언젠가 소위 '재건파'에 속한 어느 장로교회를 방문했다가 "생리 중인 여성도는 주일날 교회에 오면 안 된다"는 얘기를 공공연히 하는 것을 듣고 놀란 적이 있다. 가히 이단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교회는 죄인들이 거듭나서 된 성도가 모이는 장소이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다. 시초부터 거룩했던 자들의 모임이 아니다. 그런 곳에서 표면상의 거룩 개념만으로 사람을 차별하다 보면 죄인들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거룩의 개념은 결코 인간이 설정하지 않는다.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설정된다. 스스로 '거룩한 분'(Holy One)이시며 '거룩케 하시는 분'(야훼메카데쉬)이신 하나님은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서도 거룩하게 하시며 신약/교회시대엔 성령으로 오셨다. 성령님 자신이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이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난 자는 이미 거룩케 됐으나 더 거룩케 되기 위하여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늘 필요하다.

내용이 아닌 형식을 갖고 거룩하다 아니다를 판단하는 경우는 한때 전통적 고전적 교회음악과 CCM을 차별하던 경우에서도 명약 관화해진다. "CCM은 교회음악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식의 말은 CCM은 거룩하지 않고 부정하니 교회음악의 반열에 설 수 없다는 말과 과히 다른 말이 아니다.

CCM의 이디엄/미디엄이 통속적이므로 천하게 보이니까 덜 거룩해 보이거나 아예 거룩하지 않게 보인다는 발상에서일 것이다. 그런 말 속에는 전통음악만 거룩할 수 있고 교회음악의 반열에 서서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개념이 은근히 포함돼 있다. 바로 이런 것이 상상의 거룩, 감각 상의 거룩이다. 영적인 거룩이 아니다.

또 교회에서마다 CCM의 위치가 강화돼 가는 요즘은 CCM은 거룩하고 고전적인 교회음악은 거룩성이 떨어진다는 인식도 덩달아 강화돼 간다. 과연 그럴까?

음악은 오로지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을 때만 거룩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의 어떤 경우도 함부로 "거룩하다" "거룩하지 않다"를 논할 수 없다. 심지어 거듭난 자들만 모여 연주한다고 해도 거룩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 그런 사례를 봤기 때문에 하는 얘기다. 그리고 거룩의 개념은 전통음악과 CCM 같은 형식으로 결코 설정되지 않는다.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는 전통음악인들도 얼마든지 속으로 악을 저지르며 위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제사장들에게 사용된 거룩한 기름은 기름 자체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거룩케 해서 거룩해진 기름이었다. '성가대'는 거룩한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어야 하건만 중세교회 성가대는 귀족 계급의 일부로서 타락한 성가대였다. 형식이 거룩성을 부여해 주지 않음을 웅변해 주는 대목이다.

오로지 하늘의 기름부음을 받는 음악만이 거룩한 음악이다. 이런 거룩의 개념이 바로 이해되는 바탕 위에서 교회음악의 진로를 논할 수 있다. 음악의 거룩함은 죄인들이 그것을 듣고 눈물로 통회하거나 가슴을 치며, 손을 들고 입으로 고백하며 회개하고 거듭나고 다윋이 연주할 때처럼 질병이 낫고, 교회가 성령으로 부흥되는 역사를 통해서 나타날 수 있다.

성령은 주님을 증언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2007년 12월 1일 토요일

좋은 발성을 위한 몇 귀띔 <2>


좋은 몸자세는 발성의 기본

김삼

좋은 발성은 좋은 몸자세와 좋은 호흡을 전제로 한다. 발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선 자세의 문제도 이내 발견된다. 쉬운 예로, 구부정하게 몸을 숙인 사람에게서는 바람직하고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없다. 특히 지적하고 싶은 사항은 대체로 합창연습 때 몸자세가 매우 좋지 않다는 점이다. 있는 대로 편한 자세를 취하고선 좋은 소리가 나올 리 만무하다. 연습 때는 실연주 때보다 기분만 약간 느슨하고 여유로울 뿐, 몸 자세는 연주 때에 준하든지 대등해야 한다.

서서 노래하는 자세로서 가장 이상적인 것은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어깨넓이 정도로 양발을 벌린 위치에서 팔을 위로 쳐들어 자연스럽게 내린 채 한쪽 발을 약간 앞으로 내민 상태다. 이때 등은 똑바로 벽에 기댄 형국이며 [몸을 지탱할 정도의 발힘과, 복식호흡을 위해 숨을 들이마실 때 팽팽하게 버티는 배와 엉덩이를 제외한] 모든 몸 부위에서 힘을 빼야 한다. 특히 턱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유의해야 한다.

최근 어느 중창단의 연주회에 가 볼 기회가 있었다. 여유롭고 순탄한 매너와 발성이 무난했지만, 한가지 매우 실망스런 점이 있었다. 모든 단원들이 앞에다 스탠드를 놓고 악보를 보며 노래하는 것이었다. 단원들의 용모가 더 중요했는지 스탠드는 상당량 아래 쪽으로 내린 채였다. 처음엔 현대적인 중창 '스테이지쉽'을 위한 하나의 패션(?)이려니 생각했는데 끝까지 그러고 있었다.

이럴 경우 스탠드 위 악보를 내려다보려면 눈이 내려가고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내려가게 돼 발성에 무리가 온다. 정기연주회라면, 최소한 그날 부를 (대곡을 제외한) 일반 성가곡들만큼은 모두 암기하고 전적으로 정면을 바라 보며 연주해야 옳다. 아마추어 중창단인 데다 이민생활에 바쁘다 보니 악보 외울 겨를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년에 한 두 번 하는 정기연주회를 위해서조차 악보를 외우지 못한다면 정성이 부족한 것이다.

대곡을 위해 악보를 볼 경우라도 좋은 발성을 위해서는 스탠드를 쓰지 않는 것이 이상적이다. 스탠드를 꼭 써야겠다면, 얼굴이 보일 정도로 눈 바로 부근에까지 최대한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합창단이나 성가대의 연주 때 악보를 보려면, 악보를 쥔 손을 가급적 위로 올려 악보 위 선분이 지휘자의 눈과 거의 마주칠 정도가 돼야 한다. 그러려면 접힌 팔꿈치를 옆구리에 근접시키는 것이 좋다. 단 몸통에 갖다 대면 역시 발성에 방해가 된다. 그것이 지휘자와의 교감과 자연스런 발성에 유리하다.

노래를 할 때는 고개를 쳐들기보다 사진 찍을 때처럼 눈이 정면을 본 상태에서 고개를 약간 숙이는 것이 발성에 유리하다. 그 이유는 첫째, 소리의 초점을 모아 인중 바깥 방향으로 '투사'해주기 위함이며 둘째, 약간 고개를 숙여 입을 벌린 상태에서 성대의 방향이 정면을 향하기 때문에 소리의 전방발사에 유리하기 때문. 이 자세는 특히 음량을 요하는 포르테/포르티시모 발성에 필수적인 자세다.

일부 발성 전문가들은 (발음이나 조음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아래 턱을 길게 내려야 큰 소리가 날 수 있다는 데 거의 동의하는데, 같은 맥락의 얘기다. 그러나 굵은 목소리를 내려고 목을 마구 눌러 발성에 영향을 주면 오히려 해롭다. 그렇게 해서 잘못된 발성 버릇과 소리를 기른 앨토나 베이스를 흔히 본다. 인위적 요소가 많을수록 음악적인 소리가 안 난다.

앉아서 노래를 부를 때는 반드시 허리를 펴고 의자 등판에서 등을 떼야 한다. 특히 연습실의 합창대원들에게 주는 충고다. 이것은 엎라잇/스피넽 등의 피아노를 설치할 때 뒷면을 벽에서 떼어 놓는 것과 같은 이치다. 소리통 즉 공명강이 제대로 울려야 하기 때문이다. 등을 의자에 대고 있는 대로 편한 자세를 취하면, 몸통의 공명이 되지도 않거니와 금방 목소리에 무리가 간다. 장시간 정식 연주를 할 때보다 연습 때 쉽게 목이 쉬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다.
다시..한 번 잔소리 같지만, 좋은 발성은 우선 좋은 자세에서 온다! 이 중요한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평시 훈련과 컨디션

사람마다 기본적인 바탕소리는 갖고 있지만, 때와 환경, 몸 상태에 따라 소리가 변할 수 있다. 오래 전, 지금은 한국 음악교육계에서 활약하는 유명 소프라노에게 이른 아침 전화를 걸었다가 적지 아니 놀란 적이 있다. 꾀꼬리 같은 목청, 옥접시 위를 굴러가는 은방울 소리를 기대했는데, 그지없이 탁하고 메마른 저음으로 응답하는 것이었다.

성악을 부전공한 필자도 경우에 따라 음역과 음질이 달라져 이를 노래에 활용하는 때가 있다. 평소에 못 내던 낮은 저음으로 충분히 내려가 베이스바리톤 같은 소리를 내는가 하면, 경우에 따라 '하이C'의 테너 음이 괜찮게 날 때도 있다.

이것은 훈련에 따라 개인의 음역이나 음폭, 음량을 최대한 활용하고 조절할 수 있다는 간접적인 얘기가 된다. 그만큼 훈련이 중요하다. 친구 목회자 한 사람은 과거 성악공부를 하던 시절, 파바로티의 '하이C' 보다 4도 높은 음까지 자유자재로 냈다. 그의 '비결' 중 한가지는 역기를 든 채 구부린 자세로 발성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성악가 P 모 씨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좀 위험한 방법이다.

아무튼 좋은 발성엔 끈기 있고 센스 있는 훈련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교훈이다. 약간 허스키인 듯한 매력이 일품인 20세기의 대표적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도 한국 리사이틀 때 하루 여러 시간을 연습했다지 않은가. 물론 나이에 비해 무리였지만. 그러나 요즘 교회에서는 그런 발성연습 광경을 보기가 어렵다. 최소한 20분씩이라도 하면 별 손해 볼 게 없는데도 말이다. 이래저래 바쁜 교회 일정의 틀 속에서 쫓기는 성가 연습에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합창발성 얘기

영국 킹스칼리지 대학 합창단 같은 정련된 목청을 들어 보면, 통일돼 있으면서도 개성을 존중하는 소리임을 느끼게 된다. 강압적인 훈련으로 사람의 기를 죽여 통일된 소리를 내는 방법도 있고, 개인의 개성을 되도록 살려 주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소리도 있다. 아무튼 연습과 훈련이 중요하다.

그런데 합창과는 영 조화가 되지 않는, 너무도 독특한 소리가 발견되곤 한다. 이를테면 바이브레이션(비브라토) 빈도가 너무 다르다든가 조금만 소리 내도 표가 나는 희한한 음질 등이다. 필자는 바이브레이션의 경우 1초에 4회 진동이 바람직하다고 교수에게 배웠다.

그런 독특한 소리는 전체에 조화되는 소리로 용해되고 독특한 소리는 절감 내지 희생돼야 한다. 그럴 의사가 없다면 합창단을 떠나야 한다. 차라리 독창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기회도 있다. 대학 시절 필자는 합창 지도교수인 은사의 권고로 성부를 테너에서 베이스로 바꿨다. 테너로서는 너무 튀어나고 고음합창에 어울리지 않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부지휘자로 연주회 전 파트 합창지도를 시킬 때도 베이스 파트를 맡아 했다. 테너를 선호했던 필자는 한때 은사를 원망하기도 했었으나 훗날 바른 결정이었다고 판단됐다.

가장 이상적인 발성은 방언에서

좀 빗나가는 얘기지만, 인간의 목청의 한계는 초자연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방언으로 하는 '영적 찬양'이 그것이다. 저자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은 방언으로 말했다'란 책의 서문엔 방언을 하는 사람이 뛰어난 목청으로 찬양대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사실이다.

필자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한동안 '영적 찬양'을 경험해 봤는데, 뱃속 밑바닥에서 우러나는 듯한 신비로운 소리가 머리 끝까지 올라 가면서 상상도 못할 저음과 고음을 오가는 초자연적 발성이 나곤 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신령한 노래'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신비주의적'이라고 볼지 몰라도 기독교와 성경 자체가 신비다. 교회 자체가 신비다. 그러니 그 지체들이야 오죽하랴.

그런데 방언 노래의 발성은 비클래식보다는 클래식 발성에 더 가깝다. 그것이 필자가 얻은 결론이다.

좋은 발성을 위한 몇 귀띔 <1>


김삼

듣기 좋은 목소리는 누구나의 바람일 것이다. 성악가는 물론, 성가대원과 지휘자, 설교하는 목회자, 일반 교우들까지도 좋은 목소리를 원한다. 홍혜경/조수미처럼 국제적 명성을 떨칠 만한 천부적인 미성과 기량/테크닉을 가진 사람은 드물지만, 사람마다 개성적인 목청을 갖고 있다.

자신의 것을 훈련, 발전시켜 최대한 활용하는 것은 중요하다. 어떤 이들은 무조건 음이 높고 큰 것이 좋은 소리인 줄 알지만, 다양한 성악가들의 노래를 들어 보면 그렇지 않음을 깨달을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음악의 장르가 다원화 된 시대엔, 누구나 개성을 살려 좋은 소리로 개발해 나갈 수 있고 그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소리의 유형

그러려면 자기의 목소리가 음악의 어느 장르에 적합한 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발성법은 크게 두 가지, 클래식 발성과 비 클래식 발성으로 나뉜다. 전자는 일반적으로, 타고 난 울림소리와 울림 폭, 음량 등을 중시하여 최대한 활용하는 기법이다. 또 좋은 떨림(vibration)이 필수적이다. 거기 비해 후자는 대체로 음질과 개성 살리기에 더 치중한다. 한편 서구적 발성과 국악적, 민속적 발성도 서로 구분될 수 있다. 요즘은 한국의 판소리도 서구인들에게 퍽 어필되고 있다.

전통형 성가대는 클래식 발성을 쓰는 반면, 경배찬양 팀은 비 클래식 내지 세미 클래식 발성을 하는 예가 많다. 예를 들어 비교해 보면, 리릭 소프라노, 콜로라투라, 드러매틱 소프라노 등 가곡/오페라 가수들은 클래식 발성이다. 그런가 하면 복음성가사들 중에도 송정미/박종호 선교사나 세속가수 조영남 씨 등은 세미 클래식에 가깝고, 윤형주 장로는 보다 더 비클래식에 가깝다.

우리네 동양계엔 세계적인 성악가가 드물다. 한 마디로, 서구적 발성법 교육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다. 또, 동양인의 몸 구조는 발성학 상 서양인보다 불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선지 동양인들 중엔 미성과 맑은 소리는 많은데 깊고 그윽한 소리는 드물다. 말 소리만 들어봐도 얕은 '생소리', '밭은소리', '째짐소리'가 많다. 그런가 하면 나의 은사 한 분은 평소 말소리는 물론 웃음소리만 해도 깊고 발성적이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서구인들의 말 소리는 대체로 공명이 잘 된다. 꼭 체구가 더 커서만은 아닐 터. 우선 코가 크고 길며 앞 얼굴보다 옆 얼굴이 긴 서구인들의 머리 구조는 공명강이 평균적으로 동양인들보다 넓다고 할 수 있다. '공명강'이란, 소리의 울림이 이뤄지는 구멍들을 말한다.

성대가 자리잡은 목에 인접한 사람의 머리 부분엔 공명강이 많다. 해골을 보면 실감이 갈 것이다. 물론 몸의 다른 부분에도 공명강이 있다. 흉강(가슴통)과 복강(배) 등이다. 음악엔 도움되지 않지만 거창한 트림 소리는 복강과 흉강, 식도 등이 위아래로 한꺼번에 트이는 듯, 굵은 파이프 같은 소리다.

라디오에서 종종 미국 교계 남성 성악가들의 클래식 찬양곡을 듣노라면 굉장히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더구나 둘이서 비슷한 발성으로 남성 이중창을 할 때는 금방 라디오를 꺼 버리게 된다. 미성인데도 탁 트이질 않고 입 속으로 옹그리고 뭉친 듯한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출발부터가 자연적인 발성이 아니다.

가장 이상적인 발성법의 하나가 물론 '벨 칸토' 창법이다. 이탈리아가 역사 속에서 자랑해온 이 창법의 특징은 투명성, 완벽한 일관성과 자연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저명한 벨 칸토 소프라노가 오래 전 작고한 조운 서덜랜드 말고도 아프리칸계인 캐틀린 배틀(Kathleen Battle)이 있다. 특히 비가풍의 가락에서 더 윤택이 난다. 그녀의 노래를 듣노라면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공명강들을 최대한 울려주는 것이 좋은 발성의 지름길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결코 큰소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성대를 중심으로 소리를 내면서 공명강을 최소로 활용할 때 나는 소리가 '생소리'(말소리란 뜻으로 '화성'이라고도 한다)다. 그런가 하면, 일반적으로 '발성된' 사람의 울림소리를 머릿소리(두성)와 가슴소리(흉성)로 구분한다. 가슴이 작은(새가슴) 어린 시절엔 구성(입소리), 두성이 발달하지만, 가슴근육과 흉강이 발달하는 사춘기를 지나면 변성기와 함께 흉성도 발달한다.

음역에 따라서도 두성과 흉성이 구분된다. 대체로 높은 음으로 올라갈수록 두성, 낮은 소리로 내려갈수록 흉성에 의존하게 된다. 두성이라고 해서 머리와 목부분만 사용하는 건 아니다. 높고 힘차고 화려한 소프라노나 테너 소리를 낼 때, 몸 전체로, 특히 탄탄한 배 힘을 살린 호흡으로 팽팽히 받쳐 줘야 한다. 클래식적 의미에서 좋은 발성과 좋은 노래는 좋은 호흡과의 합일을 위한 '전쟁'이다.

웃음과 하품과 허밍

성악가들의 표정을 보면, 웃는 모습으로 보일 경우가 많다. 그것은 머리의 공명강을 최대한 넓히면서 소리의 초점을 모으기 위해서다. 실제로 크게 웃을 때 공명이 잘 되는 예가 많다. 하품 때와도 통한다. 하품하는 표정은 웃는 얼굴의 움직임과도 비슷하다. 하품할 때 소리를 내 보면, 머리 속의 모든 공명강이 트이고 열리고, 소리가 관통하면서 머리 속은 물론 가슴까지 온통 진동하는 걸 느낄 것이다. 가장 잘된 공명이란 증거다.

하나님이 내신 다양한 생리현상들 중 가장 신기한 것 한 가지가 이 하품이다. 산소를 최대한 순간흡수하기 위해 턱뼈가 자동으로 움직이고, 윗턱과 아랫턱이 있는대로 한껏 벌어지고 입술과 구강이 동시에 활짝 열려 코와 입으로 산소를 들이마시고 탄산가스를 내뱉는 것이다. 마치 고래가 바닷물을 들이켜 수많은 크릴새우를 한꺼번에 삼킨 뒤 물을 내뿜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하품소리와 가장 닮은 인위적 발성이 허밍(humming)이다. 이상적인 허밍은 하품하는 포즈로 입만 다문 상태와 가장 가깝다. 이때 혀는 자연스럽게 바짝 낮춰 구강 바닥에 깔면서 혀끝은 치열 안쪽에 댐으로써 구강을 최대한 넓혀 준다. 그래야 허밍이 아닌 '흐밍' 즉 옅은소리, 밭은소리를 피하게 된다.

허밍 상태에서 소리의 초점을 바꿔 가며 소리의 전방발사(projection)와 좋은 발성, 발음 기법을 함께 익힐 수가 있다. 아울러, 허밍할 때 높은 소리로 올라 가면서 가슴보다는 구강과 머리가 더, 낮은 소리로 내려가면서 가슴 쪽이 더 진동되는 걸 느낄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허밍은 가장 좋은 발성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찬양대가 연주 외에 평소 연습과 발성훈련을 할 때 허밍을 자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시기 상황에 따라 합창연습 시간이 짧을 경우, 자연스러운 허밍만 해 줘도 좋은 워밍엎이 된다. 이때 입 속에 큼직한 복숭아를 넣었다고 가정하고 입을 벌리도록 귀띔한다. 허밍할 때 숨을 비강(콧구멍) 쪽으로 옮기면, 콧소리(비음)가 유난히 난다.

입을 열어 보면 표가 난다. 허밍을 통해 발성을 계발해 나갈 때 유의할 것은 콧소리를 피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허밍으로 발성을 잘못 배워 콧소리를 섞어 가며 노래하는 성악가들이 퍽 많다. 비음이 심한 성악가는 음악계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입증된다. 허밍에 있어 또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음량이나 길이 등에 무리해선 안 된다는 것. 필자의 경험으로는, 허밍 연습이나 연주를 오래 하는 것은 효과 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허밍은 바른 발음에도 크게 도움된다. 특히 한글 받침소리 이응(ㅇ)과 미음(ㅁ), 니은(ㄴ)의 바른 울림에 허밍의 울림소리와 소리의 바른 초점잡기가 기초가 돼야 한다. 발음과 조음(articulation)에 대해서는 딴 기회에 자세히 다루련다.

허밍은 연습 때만 아니라, 실제 연주에도 활용된다. 가사 없이 소리만 내는 허밍 합창은 언제나 듣는 이들에게 신비감을 준다. 독창에 곁들여지는 무반주 배경음악으로도 자주 쓰인다. 물론 반주를 곁들여도 나름의 효과가 있다. 이때 모든 성가대원의 공명의 위치 내지 소리의 초점이 동일해야 완벽에 가까운 허밍의 조화가 달성된다.

2007년 11월 30일 금요일

교회음악의 가사 전달


김삼

몇 년 전 한국서 휴가를 보내며 경향 각처의 몇몇 교회를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한국 교회음악은 필자가 이민을 오던 20여 년 전에 비해 크게 발전했다. 발전의 주된 에너지는 테크닠 및 표현의 이중적 발전과 창작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일반음악 면에서, 과거 한국음악은 테크닠은 좋지만 표현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그러나 국제 음악 환경에서 연구 활약하던 유능한 음악인들이 한국 음악계 전반에 고루 진출해, 서울과 지방 사이의 골이 메워지고, 교회도 이들을 적극 수용하면서 테크닠과 표현이 '평준화'돼 가고 있다.

창작 면에서는, 국제저작권법이 한국에서도 제대로 발효되어 서구교회음악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체 곡 개발에 힘쓰게 되면서 나름의 좋은 곡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최근 방한 당시 몇 교회에서 들은 곡들이 그러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각처에서 그렇듯, 한국도 전통 교회음악과 CCM 내지 현대 경배찬양곡의 병존 현상도 두드러진다.

크고 작은 교회들이 두 가지를 병행하고 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교회 존립에 지장을 받을 수 있다고 느끼는 듯 했다. 그러나 전통적 음악과 CCM 사이의 벽은 아직도 두텁다. 찬양대와 CCM은 늘 서로 독립돼 있고 때로는 서로를 경원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한국 교회음악이 전반에 걸쳐 평균적으로 국제 수준으로 떠올랐냐면, 그건 아니다. 교인수 약 3만인 어느 수도권 교회 찬양대가 펴낸 최신 음반을 입수해 들어 봤는데, 유감스럽게도 졸작으로 느껴졌다. 미국 음대 출신의 지휘자가 100여 명의 성가대와 오케스트라를 감독/지휘를 했는데, 지휘자 자신의 특징 견식이나 레퍼토어에 제약 받았는지, 선곡이 자유롭지 못해 전반적으로 답답하고 이렇다 할 감흥을 주지 못했다.

화려하고 영롱한 클래식 합창성가곡을 간간히 펼쳐 부른 것도 아니고 좀 난해한 현대 합창곡을 삽입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두루뭉실했다. 다만 성가대의 합창 실력은 상당했고 오케스트라도 수준급이었다. 모처럼 만드는 음반을 과연 이 정도 '적당 수준'의 레퍼토어를 갖고 막대한(?) 돈을 들여 가며 해야 했을까? 교회 홍보용으로도 마이너스에 가깝다고 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특히 실망한 건, 녹음과 출반 수준. 가사도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고 허공중의 웅얼거림처럼 맴돌 뿐이었다. 제목만 갖고 짐작할 뿐이지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길이 없다. 가사 모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마디로 CD 주얼케이스 속 재킷 디자인만 근사할 뿐이었다.

이 참에, 한국과 한인 교회음악인들에게 충고하고 싶은 것이 있다. 교회음악에서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닌, 텍스트의 표현(articulation)이다. 순수기악을 제외한 성악의 경우, 성경말씀이나 신앙고백에 가까운 가사를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교회음악은 거의 무의미하다.

소리는 극명해야 한다. 성가대는 회중에게 가사전달을 제대로 하기 위해 할수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음대에서 배우는 외국어 발음법을 한글에도 잘 적용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아멘', '영광' 등 한글받침의 여운 처리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외국 지휘자나 발성교수, 음악목사 등이 매우 철저히 다루는 부분의 하나가 가사의 articulation이라면, 한국의 찬양대/교회합창단 지휘자들이 대체로 가장 소홀히 하는 분야라는 점이다.

소리들 중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음악에 치여, 부르고 듣기에 흐리멍덩한 소리로 사라져 버리는 셈이다.

선거후보나 정치가의 생명은 확실한 연설이다. 고도로 의사전달이 훈련되고 잘 준비된 정치후보나 연사들처럼, 노래 가사의 전달도 분명해야 한다. 지휘자는 성가연습 중 수시로, 귀가 잘 발달된 대원을 시키든지, 아니면 본인이 직접 떨어진 거리에서 가사 발음을 들어보고, 잘 분별되지 않는 자음과 모음 발음은 몇 번이고 연습시켜야 옳다.

찬양이 '짜냥', 천국이 '청국', 사망이 '야망'으로 들려선 안된다. 그래도 가사 전달은 완벽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협력을 받아 되도록 매 주일의 성가 찬양곡 가사를 주보에 실어야 한다. 주보에 성가가사를 꼬박꼬박 실어주는 자상한 목회자야말로 교회음악과 찬양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는 바람직한 사역자이자 든든한 후원자다.

주보에 공간이 부족하면 사이종이(간지)로라도 끼울 수 있다. 성가음악회, 칸타타연주회 때도 수고스럽겠지만 순서지에 가사 전체를 실려야 옳다. 특히 음반을 낼 때는 절대로(!), CD 재킽 북에다 모든 낱곡의 가사를 수록해야 한다.

"하나님께 직접 바치는 것이므로 회중은 가사 내용을 몰라도 된다"는 발상은 엄청 잘못된 것이다! 교회는 회중 중심이지, 성가대나 지휘자 중심이 아니다.

'아멘'의 발음을 다시 살펴 보자. 흑인영가 등 특수효과를 위한 순간 받침처리의 특수효과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아멘'의 '멘'은 '메---ㄴ'식으로 모음 'ㅔ'를 늘여준뒤 (적당한 길이의 미분이 가능한) 마지막 음표에서 니은 받침('ㄴ'/n)의 여운을 확실히 처리해줘야 한다. 다른 받침소리도 이에 준한다. 이를테면 온음표의 경우 4분음표, 2분음표일 경우 8분음표 단위로 나눈 마지막 음표에서 마무리하는 식이다.

곡의 끝에 붙은 장박 아멘인 경우 물론 'ㄴ'(n)도 상당량 길어진다. 그것은 은은한 메아리와도 같다. 그러기 위해선, 지휘자가 'ㄴ'의 순간을 손으로 섬세하고 미묘하게 표시해 줘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 주는 지휘자가 그리 흔하진 않다. 이 사인을 해 줄 때 성가대원 중에는 아예 허밍을 하여 'ㄴ'이 아닌 'ㅁ'에 가깝게 발음하는 대원도 있다. 그러나 'ㄴ'(n)은 입술이 약간 벌어지고 입천장에 혀가 붙는 반(half) 열림소리 내지 '절반 허밍'의, 완벽한 것이어야 한다.

미음받침 'ㅁ'과, 허밍에 가까운 이응받침 'ㅇ', 니은받침 'ㄴ' 등 반열림소리들은 평소 고도의 훈련을 요한다. 허밍은 그야말로 허밍이어야지, 입천장이 낮은 '흐밍'이 돼선 안 된다. 입 속에 호두알을 문 양 구강을 최대한 열고, 혀끝은 아래 치열에 납작하게 대면서 소리의 초점을 바깥 인중 쪽으로 쏘아 내듯 튀겨 주는 것이 이상적이다. 이럴 때 입속 코 근처 부분이 떨리거나 간지러운 사람들도 있다. 화살처럼 순간 액센트를 넣은 허밍과 부드러운 허밍을 둘다 연습하도록 한다.
허밍과 두성의 가장 완벽한 훈련 한 가지는 하품을 일부러 해 보는 것이다.

회중 찬송 이끌기

김삼


강단에 서서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은 찬송가나 기타 노래도 마이크 앞에서 크게 부르기 때문에 결국 회중찬송도 이끌어 가는 셈이 된다. 익숙한 찬송가는 대부분 무난히 부를 수 있겠지만, 자주 부르지 않는 찬송가 또는 평소 잘 불렀더라도 멜로디를 잊어 버리는 경우 부득불 틀리게 부르게 된다.

목회자나 예배 인도자가 찬송가를 곡조에 맞지 않게 부르는 광경을 자주 본다. 특히 곡조 위아래가 거의 같은 멜로디의 형식인데 약간 달라서 혼동될 경우 그렇다. 또, 인도자가 소위 '음을 다스리려는 사람'(음치)이면 원음보다 반음이나 한음 정도 높낮이가 다르거나 또는 반주에 전혀 맞지 않는 엉뚱한 음으로 부를 수 있다.

그럴 경우, 독보(악보읽기)나 음에 익지 않은 성도들은 인도자가 잘못 부르는 찬송가를 잘못 따라 가면서 잘못 배우게 된다. 특히 평소 잘 부르지 않던 찬송가를 무리하게 부를 경우 그렇다. 필자가 그랬다면, 솔직히 하나님께나 교인들, 방문객들 앞에서 송구스럽거나 망신살로 느껴질 것 같다. 더 큰 문제는, 틀리고도 자신은 전혀 모르고 틀린 대로 태연하게 힘차고 씩씩하게 불러 나가는 경우다.

모름지기 예배 인도자는 그 날 예배를 위해 미리 잘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 성가대는 다음 주일 특별찬양을 위해 미리 꼬박꼬박 리허설하게 시키면서, 찬송가에 익숙지 않은 예배 인도자가 다음 주일 예배 때 부를 찬송가를 미리 연습하지 않는 것은 넌센스다.

인도자는 물론, 모든 예배관계자들, 음악사역자들은 적어도 다음 주일 회중찬송가를 미리 몇 번 정도 불러 보는 성의를 기울여야 한다. 멜로디가 익숙지 않은 찬송가는 틀리지 않게 부를 수 있을 때까지 연습을 해야 옳다. 또 임의로 즉석에서 선곡하는 곡의 경우 멜로디에 자신이 없으면 잘 준비된 사람에게 이끌게 해야 한다. 무리하게 나서서 이끌면 예배 분위기를 흐린다. 예배 이끔이가 자신의 서투른 찬송가를 남이 "은혜롭게" 들어 주길 바라는 것은 일종의 청중 학대 행위나 같다. 간증시간 도중이라면 혹 모를까.

CCM은 구성지게 잘 불러 젖히면서 찬송가는 터무니 없이 적당히 부르는 사람도 없지 않다. 매주 예배 전 미리 찬송가를 연습할 만한 여유가 없다면, 기독교 서점에 흔해 빠진 찬송가(녹음) 전집이라도 구입해서 해당 찬송가를 몇번이고 듣고 따라불러야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게으름' 이라고 할 밖에.

예배 때 부를 만한 찬송가들은 평소 미리 익히는 것도 중요하다. 마치 끼니 때마다 양치질을 하듯, 평시에 공적, 사적인 장소에서 찬송가마다 정확하게 부르는 습관을 길러 두면 좋다. 독보법(악보를 읽는 법)을 배우면 더욱 좋다.

잘 연습을 했더라도 강단에 서면 멜로디를 잊어먹거나 도무지 음에 맞게 부를 수 없는 사람도 간혹 있다. 그런 교회는 예배 인도자 자신이 마이크로 찬송가를 이끌어 갈 게 아니라, 정확하게 잘 부를 수 있는 사람을 내세워 회중찬송을 이끌게 해야 한다. 그것이 정석이다.

찬송가를 정확히 잘 부르지 못하면서 단지 목회자, 인도자란 이유만으로 평소 연습도 없이 무리하게 회중찬송을 리드하려는 것은 독단에 속한다.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예배음악 사역자는 왜 고용했는가.

그리고 인도자가 워낙 음악에 소질이 없으면 모르되 평소 잘 부르다가 어느날 예배 때 잘못 불렀다면 그 찬송가 멜로디는 일반교우들에게도 까다롭다는 얘기다. 회중찬송가 멜로디는 평균적으로 무난히 부를 수 있도록, 쉬운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음악목사, 성가대, 지휘자, 반주자 등 교회음악 사역자는 단지 특별찬양 준비와 연주에만 힘쓸 것이 아니라, 일반회중이 찬송가나 복음성가, 경배찬양을 바로 부를 수 있게 하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옳다.

회중찬송 수준은 저급한데 성가대만 잘 하면 무슨 소용인가. 그거야 말로 종교개혁 원인의 하나였던 사제/성가대 귀족화인 것이다. 그것 때문에도 마르틴 루터는 교회음악 개혁도 부르짖고 나선 것이다. 루터는 제대에 섰던 성가대를 일반회중 사이에 앉혀 함께 부르게 했다.
신약시대 성가대나 찬양팀은 귀족이나 사제 계급이 아니라 회중의 일부다. 그러므로 따로 특별찬양만 할 게 아니라 회중찬송도 이끌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예배인도자나 목회자는 미리 음악사역자와 함께 찬송가를 연습하여 예배 때 틀리지 않게 부르든지, 평소 독보법이나 찬송가 부르기를 익혀 불시에 당황하지 말든지, 자기 대신 더 잘 부를 사람 즉 지휘자나 성가대원을 마이크 앞에 세우든지, 회중찬송 때 아예 마이크 앞에 서지를 말든지 해야 할 것이다.

바람직한 찬송가 반주 방식


김삼


혼성4부 합창 형식으로 된 찬송가 악보를 그대로 치는 것은 반주의 의미가 없다. 그것은 1개 화음을 위해 10개의 손가락들 중에서 4개만 사용한다는 뜻이다. '건반 위에서의 합창'일 망정 반주는 아니다.

한인교회에서의 회중찬송 반주 양태를 크게 3 종류로 나눠 볼 수 있다.

1. 찬송가 악보를 거의 그대로 친다.
2. 찬송가의 원 화성 진행을 대부분 무시하고 적당히 친다.
3. 원 화성 진행을 중시하되 폭넓게 편곡해 가며 친다.

위에서, 3이 바람직하다. 위 1.의 경우, 반주가 아닌 독주나 간주 등에서 일시 합창 효과를 낼 때는 괜찮다. 특히 오르간이 그렇다.

성가대가 사용하는 무반주(a capella) 합창곡, 즉 4 성부를 파트 별로 한 줄씩 네(4) 줄로 나열한 합창총보(score) 아래, 역시 4성부로 된 작은 건반악기 악보를 흔히 본다. 거기 '연습용'(for rehearsals only)이란 말이 딸려 있다. 반주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부 연습을 위한 것일 뿐이다.
무반주 합창곡에다 구태여 반주를 넣겠다면, 제대로 편곡해 가며 반주답게 연주해야 한다. 반주자의 역량이 필요하다. 아니면 되도록 지휘자가 편곡을 해줘야 한다.

위에서 2.의 경우도 바람직한 반주는 아니다. 이 방식을 쓰는 반주자들은 혹 독보를 제대로 하지 못해 화음을 무시하거나 처음부터 원 화음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하는 두 가지 경우다.
특히 재즈나 락, 경배찬양 등 '경음악' 식 반주 스타일에 흔한 반주법이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재즈 화음(또는 기타코드)을 쓰더라도 원 화성에 붙여 분석하여 붙일 수 있는데도, 귀찮아서 하지 않는 때가 많다. 요즘은 기타코드가 붙은 찬송가도 나와 있다.

특정 찬송가의 작곡가가 본래 의도한 오리지널 화성과 조성은 성도들이 어릴 때부터 귀로 익혀 기억 속에 간직돼 온 것이다. 따라서 각 찬송가에 나타나는 화음 진행 순서를 주요 화성을 중심으로 최대한 존중해서 반주해야 한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도 낱낱이 원곡의 각 화음에 충실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적극적 의미의 찬송가 편곡이 불가하다는 말이 돼 버린다.

찬송시에 곡을 붙이는 작곡가는 주어진 가사 중 주로 1절을 갖고 멜로디와 화음을 붙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주로 1절 가사의 분위기/정서에 맞춰 화성 진행이 돼 나간다고 봐야 한다. 우리가 어떤 노래를 애창할 때 거기 붙은 특정 화음의 매력 때문에 좋아진 예가 많다. 그 화음을 무시하고 엉뚱한 화음을 붙이는 경우 기분이 전혀 바뀌어 버릴 수도 있다. 그 정도로 사람의 화음감각은 예민하다.

성가대를 위해 찬송가를 편곡한 합창곡에서 효과를 위해 오리지널 화음이나 조성을 적당히 무시할 수는 있다. 이를테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에서 중간부분을 단조로 바꾸는 것 등이다.

그러나 회중찬송가를 위해서는 작곡가가 원래 붙인 화음의 주요 흐름을 되도록 따라 주는 것이 좋다. 더욱이 회중 가운데는 어릴 때부터 4부 합창의 한 파트를 배워 익숙하게 부르는 교우들이 적지 않다. 그럴 경우 전혀 다른 화음이 계속 튀어 나오면 기대감이 깨어져 화성으로 부를 마음마저 사라진다. 그러나 예배 도중 회중 찬송 순서에서 다같이 유니슨으로 잠재적인 합의가 있을 때 온갖 화음을 동원한 반주가 있을 수 있다. 특히 오르간이 그렇다.

오르간/피아노/키보드/관현악단/밴드 등이 동시에 찬송가 반주를 할 때는 더더구나 원곡의 화성 진행을 무시하고 자유자재로 화음을 바꾸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혼자 반주할 경우라도 이에 준하는 것이 좋다.

이제 위 3.의 방식을 좀 더 풀어서 얘기해 보자. 효과적인 반주를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찬송가의 상3성부(세 윗소리 즉 소프라노/앨토/테너 음)는 오른손으로 다 커버하고, 저음부인 베이스 파트는 왼손으로 1옥타브(8va.) 아래를 곁들여 8도 병행한다는 것은 웬만한 반주자들은 다 아는 상식이다.

이럴 때 왼손은 마치 오르간에서 페달 음을, 관현악에서 첼로 군에다 더블베이스(콘트라베이스)군을 곁들이는 것 같은 중후한 효과를 낸다. (물론 오르간 페달이 찬송가의 베이스라인을 따라 항상 8도 병행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좋은 주법이 아니다).

반주자가 찬송가의 4성부 악보로만 따라 치다 보면, 테너와 베이스 성부가 1 옥타브 이상 벌어질 때 커버하지 못하게 된다. 그럴 때 4 성부 중 어느 하나를 일시 빠뜨리는 반주자들을 자주 본다. 특히 삼화음 중 결코 빠져서는 안 될 제3음(예를 들어 5도 화음 '솔시레'에서 '시'에 해당)을 빠뜨리면 "이 빠진" 소리가 난다. 그런 반주자는 상3 성부를 오른손으로 치는 주법을 익히면 필수 음을 빠뜨릴 염려가 없다.

상3 성부를 오른손으로 치고 베이스를 왼손으로 8도 병행하는 주법은 베이스가 강해지는 장점이 있는 반면, 멜로디를 비롯한 나머지 성부가 상대적으로 약화된다. 이런 반주에 익숙한 사람은 따라서, 베이스 반주를 다른 성부보다 비교적 음량(volume)을 작게 치는 것이 좋다.
그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이 있다. 오른손으로 치는 3성부에서 멜로디 즉 소프라노 부분을 베이스처럼 8도 병행시키는 방법이다. 그럴 경우 오른손의 네 손가락, 또는 다섯 손가락을 모두 활용하는 경우가 많게 된다.

즉 멜로디를 다섯 손가락 중 바깥 쪽 두 손가락으로 동시에 치면서 가운데 세 손가락으로는 중음(가운데소리 즉 앨토/테너)을 커버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빠른 템포의 찬송가인 경우 계속 8도 병행을 해 나가기는 어렵기 때문에 적당히 조절해야 한다.
편곡된 찬송가 반주곡을 유심히 살펴 보면, 늘 멜로디를 8도 병행 하지는 않거나, 중음 부분을 생략시킨 채 (멜로디만) 8도 병행하는 경우가 잦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계속 중음을 생략하면 역시 '이 빠진' 결과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손에 무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특히 동양인들은 평균적으로 서양인들보다 손바닥이 상대적으로 좁고 손가락이 짧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건반악기는 원래 서양인들을 위한 악기였다는 걸 잊지 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양인 현악 독주자는 많아도 유명 피아니스트는 드문 까닭이 바로 그 때문이다(혹 생각 있는 악기 제조업자들은 동양인 손가락 사이즈를 위한 피아노를 개발해도 괜찮을지 모른다).

위 3.의 방식을 쓰는 반주자가 서구교회엔 매우 많은데 한인교회에 많지 않은 이유는 연습이 부족하거나 연습이 귀찮거나 손이 작아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찬송가 편곡 반주곡, 독주곡을 잘 활용하면 가장 좋은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뛰어난 반주자는 오케스트라와 같은 효과를 낸다. 그렇다 해서 항상 화려하게 펼친 분산화음으로 1-4절까지 계속 쳐 대는 것은 좋지 않다. 아래에, 바람직한 반주에 꼭 필요한 몇 가지 제언을 해 둔다.

찬송가 1,2,3,4절을 각각 다르게 반주해 보도록 노력한다. 단 주요 화성진행은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가끔 옥타브 위 높은 음으로 반주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아래의 낮은 음으로만 계속 치는 것은 좋지 않다.

화성으로만 치지 말고 때로는 찬송가 한 부분의 멜로디를 양손으로 치면, 회중의 가사와 멜로디를 동시에 강조해 주는 효과가 난다.

한 마디를 거의 또는 다 차지하는 장음(온음표와 같은 긴 음)의 경우 건반 아래 쪽에서부터 위쪽으로 오르내리는 화려한 스케일의 분산화음을 활용하되 곡의 분위기에 맞춘다. 단, 너무 자주 사용하면 되레 역효과가 날 수 있다.

멜로디가 서서히 진행되는 찬송가의 경우 블럭코드(block chords)를 활용하면 매우 효과적이다. '블럭코드'란, 화음묶음을 건반 옥타브 아래 위로 오르내리면서 울려 주는 방법이다. 이때 원칙적으로 5,8도 병행은 피하는 것이 좋다. 균형이 깨지기 때문이다.

행진곡조의 찬송가는 화음 안에서 스타카토 주법을 자주 활용한다. 일례로, '믿는 사람들아'(389장) 같은 경우 시작 부분의 베이스 진행을 (후렴처럼) '도, 솔, 도, 솔...' 식으로 가볍게 스타카토로 쳐 주면 매우 효과적이다. 물론 항상 이 방식으로 하면 지루하다.

일정한 화음이 2 마디 이상 지속될 경우, 건반 위 같은 위치에서 당김음(싱코페이션/강박에서 짧은 음이 앞서는 경우. 예: 8분음표+4분음표+8분음표)코드를 반복해서 치면 현대적인 효과가 난다.

3화음이 포함된 7, 9, 11 화음을 활용하고 '화음밖의 음'(불협화음)을 적시적소에 활용하면 효과가 증대된다. 예를 들어 뒤에서 해결해 주는 지속음(suspensions)이 그렇다. 단,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진행되는 화음은 찬송가 반주에 적절하지 않다. 찬송가는 본래 서양 전통음악이란 점을 잊지 말라.

참고로 미국인교회 반주자들을 보면, 익숙한 오르간 반주자는 3,4절 사이에서 간주로 조옮김(이조)을 하여 마지막절에서 분위기를 밝게 고조시켜 마무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드물다.
또 전통적인 미국교회 다수는 찬송가 한 절 전체를 모두 전주해 줌으로써 멜로디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 미리 분위기에 젖어 들게 해 준다. [요즘은 미국교회도 거개가 현대화 돼 간다.] 전주의 가치를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인교회는 친교/오찬 등 시간 관계 상 전주를 짧게 해 버린다. 교인들이 자연히 얼렁뚱땅 허둥지둥 따라가기 마련이다. 회중찬송이 예배나 설교의 '장식품'에 불과한가?

특히 한인 중대형교회는 목회자나 회중의 바람에 따라 모든 찬송가를 빠르게 달려 가듯 부르는 습관 내지 타성이 붙어 있다. 각 찬송가의 개성을 죽이는 행위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더 느리게 명상적으로 불러야 할 찬송가가 많다. 역으로, 찬송가마다 느리게 질질 끌면서 부르는 것도 분위기를 죽이는 결과를 낳는다.

음악의 해석은 전문가가 해야 정확하고 권위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음악교육과 음악대학은 왜 있는 것이며 교회음악인은 왜 존재하는가? 왜 비싼 비용으로 교회음악인들을 고용하는가?

오르간과 피아노로 동시 반주할 경우, 오르간의 음량이 너무 커서 피아노 소리가 죽어선 안되며, 피아노는 되도록 건반 전체에 폭넓게 펼쳐 '오케스트라' 효과를 내도록 한다. 오르간과 피아노가 동시에 거의 찬송가 악보 그대로 하는 반주방식은 서로 다른 악기를 둘다 죽이는 결과를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