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6일 목요일

걸러내야 할 성탄 찬송가 속 전설들


김삼


찬송가의 영향력은 크고 깊다. 상상 이상이다. 때로는 설교 이상의 파워를 발한다. 정서와 직관에의 호소력이 강한 음악 매체로 전달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비록 찬송가 가사는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하지만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구절들이 잠재의식에 미치는 비 진리와 부정적 해악이 있을 때는 문제시 된다.

미국엔 '도시의 전설'(urban legend)이란 게 흔하다. 그 옛날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구수한(?) 고리짝 시골 야담과는 전혀 다른 현대 야담들이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나도는 황당한 풍문을 가리킨다. '믿거나 말거나'(Believe It or Not) 식 미스터리와는 또 다르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행 찬송가 가사들 중에도 성경으로 검증되지 않은 채로 방치된 '전설'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특히 크리스마스 캐럴들이 유난히 그렇다. 우리가 코흘리갯적부터 수십 년 간 애창해 온 해묵은 곡일수록 전설도 뿌리 깊다. 다행히도 찬송가 속 전설의 불꽃은 성경과 대조해 보면 쉽게 꺼트릴 수 있다.

세(3) 동방박사 설(찬송가 116장, 123장4절)은 대표적 사례. 영문 가사는 더하다. 박사들이 '왕'이었다는 설은 성경이나 역사 상으로 확인되지 않은 옛 설화에서 왔다.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에도 박사들은 으레 3명으로 등장한다. 아예 누구누구였다고 구체적으로 이름까지 등장하기도 한다. 성경에는 없는 '라파엘'이란 천사 이름을 등장시킨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에서처럼.

성경기록 상 황금·유향·몰약 세 가지 예물을 드렸다는 단서 때문일텐데, 꼭 세 명이란 보장이 없다. 세 명인지 너덧 명 또는 그 이상인지 성경본문으로는 알 길이 없다. 세 명이었을 수도 있지만 딱히 세 명은 아니다. 예/아니오 가 분명해야 한다.
이쯤이면 "또 그 얘긴가. 제발 좀 따지지 말고 그냥 둘 수 없나?"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찬송가 가사를 성경 같은 지극한 위엄과 권위로 무장된 절대 진리로 믿고 수정 불가 대상으로 삼는 예도 없지 않다. "비본질적인 것을 너무 거들지 말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점(iota) 하나라도 가감할 수 없는 절대진리일진대 성경에서 인용되거나 포함된 글 내용도 성경 그대로여야 하지 않겠나.

찬송가 속 전설은 상상을 중시하는 문학이란 매개체를 빌려 표현되다 보니 발생하기가 더 쉽다. 솔직히, 작시자가 찬송가 가사를 쓸 때 성경 진리와 문학적 상상 사이에 치열한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게다가 작자 자신의 신학적, 사상적 배경과 잠재의식까지도 적지 아니 가세된다. 설상가상으로 영어나 라틴계 언어는 전통시의 운율법(각운·압운법)을 억지로 끼어 맞추다 보니 본의 아니게 엉뚱한 말을 갖다 붙이기 십상이다.
문학적 상상도 좋지만 어디까지나 성경 진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 찬송가가 성경말씀을 담는 진리의 그릇과 생명 전달의 매개체이기 원한다면, 지나치게 부풀린 상상과 전설의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

또 다른 '전설'을 들춰 보자. 흔히 마르틴 루터의 작사로 잘못 알려진 113(114장)의 경우 '육축 소리에 아기 잠 깨나 그 순하신 예수 우시지 않네'로 되어 있다. 언뜻 그럴싸 하지만 입증되지 않은 상상이다. 가축 울음소리에 정말 아기가 깨셨는지는 그냥 두고라도 당시에 우시지 않았음을 어떻게 알고 기정사실화 한 것인가. 엄밀히 말해 가축 소리에 아기가 울었을 수도 안 울었을 수도 있다.
가축소리에 깨어 운다고 해서 순하지 않은 아기인가. 주님의 온유하심은 사실이지만 아기란 태어난 직후부터 자주 울어대는 것이 당연하다. 아기가 내지르는 고고성이 힘찰수록 건강한 것은 아닌가. 이 전설은 양육법이나 아동심리학에도 맞지 않는 얘기다. 또 110장 1절 가사 '어머니의 기도, 아기 우는 소리' 와는 서로 사뭇 어긋맞다.
필자 생각에는 아기가 울었다는 것이 더 인간 예수 답다. 어른 예수도 땅에 계실 때 한없이 우셨다(히5:7). 아기가 순하기 때문에 또는 순하기 위해서는 울지 말아야 한다는 조항이 당시 유대 율법에라도 있었던가. 작자의 상상적 미화작업이 이런 전설을 배태시킨다.

저 유명한 '고요한 밤'(109장)을 보자. 1절 첫 줄을 원문에 가깝게 옮겨 보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모두들 평온하고 환하여라'로 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카톨릭 신부 요젶 모르의 시다. 이 노래도 첫 단추부터 잘못 끼어져 있다. 베틀레헴의 그날 밤은 결코 고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을 역사상 가장 시끄러운 밤이었을 성싶다. 당시 천하로 호적하러 온 사람들 탓이다. 베틀레헴 출신의 본토인들뿐 아니라 해외 유대인들까지 몽땅 몰려 들었으니 얼마나 시끌벅적했겠는가.

해외 유대인들은 수백 년 전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함락될 당시 타국으로 끌려간 이래 이스라엘 주변국과 소아시아와 유럽전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의 후손―소위 흩어진 사람들(디아스포라)이었다. 시간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기사를 보면 당대 유대 디아스포라의 폭을 어림할 수 있다. 파르티아/메디아/엘람/메소포타미아/카파도키아/폰투스/아시아/프리기아/팜필리아/아이귑트/퀴레네/리비아/로마/크레테/아라비아 등에서 골고루 와서 명절 축제에 참가했다.

그런데 예수 탄생 때도 로마제국 치하의 '모든 사람들'이 호적하러 왔다고 했으니 상상해 보라. 이 광대한 지역에 흩어졌던 유대인들 중 인구조사에 응하러 온 베틀레헴 출신들은 죄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그날 밤 이 작은 동네로 한꺼번에 운집해 들어왔다. 집이란 집, 골목이란 골목이 모두 빈틈없이 빼곡이 들어찼을 것이다.

마리아와 요셒이 머물 곳이 없었던 이유가 거기 있다. 그 작은 베틀레헴 시가에 사관(私館) 즉 객사(客舍)가 있다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사관이 있더라도 방이나 코너가 남았을 턱이 없다. 그냥 집 바깥이나 인근의 들에서 묵는 사람들이 숱했을 것이다. 성경학자/고고학자들은 요셒/마리아 커플이 친척들에 밀려 아래 층 구석의 구유 근처에 잠자리를 얻은 것으로 추정한다. 그럼 친척들의 대화소리가 오죽 시끄러웠겠는가.

오래 헤어져 있던 친지, 처음 보는 친척들, 동향 출신들이 서로 어울려 밤새 북적대며 이야기꽃을 피웠을 것이고 포도주로 목을 축여 가며 얘기하느라 취한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다윗 왕가의 본향이었기에 동네는 작지만 출신자들의 자부심과 목청도 작지 않았을 법하다. 혹 서로 잠자리를 비집느라 온갖 타국어로 소리질러가며 다투거나 급기야 같은 타향 출신끼리 뭉쳐 패싸움을 벌이거나 술이 거나하게 취하지나 않았으면 다행일 정도였을 것이다. 아비규환을 이루지는 않았을 망정 '고요한 밤', '평온한 밤'과는 거리가 먼 정경이 아니었을까.

베틀레헴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스라엘 전국은 어떠했겠는가. 아니 로마 제국 전체가 구석구석 통째로 어수선했던 밤이다. 그런 야단법석과 왁자지껄한 소란, 소음의 와중에 마을 어느 한구석을 빌려 마리아가 출산한 것이다. 아기 예수는 이처럼 시끄럽고 죄 많고 절망과 흑암으로 가득 찬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 성경적인 베틀레헴의 그 밤은 이 찬송가의 분위기와는 영 딴 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란 말은 왜 나온 것일까. 알프스 산자락 티롤의 정적 속에 고요히 살아 온 시인 모르 신부의 머리 속에 똥겨진 단순한 문학적 발상이었던 것이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 기도 드릴 때'도 있음직한 일을 그린 것이지 성경 속 실상황은 아니다.

역시 카톨맄 냄새가 짙은 '이새의 뿌리에서'(106장)는 1절 "한 추운 겨울 밤"이란 구절이 또 다른 전설의 뿌리다. 123장 1절(영어원문)도 그렇다. 아기 예수가 오신 그 날은 과연 추운 겨울밤이었을까. 하고많은 좋은 날씨가 있는데 왜 하필 한겨울에 인구조사를 시킨단 말인가.
당시 아우구스투스 옼타비아누스는 비교적 총명한 황제였다. 또 추운 겨울엔 목자들이 들에 머물면서 양을 칠 수가 없다는 게 이스라엘 현지 상식이다. 그러니 '한 추운 겨울밤'의 성탄은 논리상 모순되다. 이같은 모순은 단적으로 고대 로마교회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채택한 결과에서 왔다.

111장의 원문 1절에는 한술 더 떠 '그리스도 우리 구주가 크리스마스에 나셨음을 기억하라'란 문구가 들어 있다. 12월 25일에 오셨다는 말인 셈이다. 그러나 그 날짜에 태어나시지 않았을 뿐더러 태어나신 해도 역사적으로 A.D. 원년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110장 원문 1절은 한글로는 '하늘에는 뭇별'로 옮겨 썼으나 원문은 '하늘엔 별 하나'로 되어 있고 후렴 첫 부분의 '그 별'과 연결된다. 즉 동방박사를 이끈 큰 별을 뜻한다. 그러나 아기 예수가 갓 나셨을 당시 이 별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동방박사들이 온 것은 탄생 후 퍽 한참만의 일이다. 성경은 '아기'(브레포스/눅3:)와 '아이'(파이디온/마2:)라는 서로 다른 낱말로 이를 암시했다. 같은 시차적 모순의 냄새를 풍기는 캐럴은 109장(3절 원문)도 있다. 대부분의 크리스마스카드와 장식에도 탄생 장면과 별이 한데 어우러져 있어 이 같은 전설의 들러리 노릇을 하고 있다.

성탄 캐럴들 원문에는 또 '마구간'(stable)이란 용어가 마구 가고 있다. 111장 가사(존 언더우드 영역)가 그렇다. 119장 1, 2절은 '낮은 마구', '마구간' 등으로 거듭 강조한다. 영어원문은 cattle shed(가축우리), stable(마구간), stall(외양간) 등의 낱말이 총동원됐다. '말구유'(124장)란 말도 그렇다.

4복음서 전체의 실제 탄생기사에는 마구간이란 말이 전혀 없고, '구유' 딱 한 마디 뿐이다. 결국 마구간이란 용어는 '구유'에서 유추된 부산물이다. 주의 천사가 들의 목자들에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표적'이라고 했으므로 이 구유는 목자들이 익히 아는 동굴 속 양 구유였거나 비교적 발견하기 쉬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성경 고고학자의 말을 들어보면, 고대 이스라엘의 구유는 집안이나 길가에 돌, 진흙 등으로 만든 여물통으로 말이 아닌 양떼나 나귀 등의 밥통·물통 역할을 했다. 당대의 말은 왕이나 왕궁의 파발마, 영화 벤허 속에서와 같은 귀족 전차몰이(charioteer)들이 사용할 수 있었고, 마구간은 왕궁이나 귀족의 사저에만 존재했다.

요셒과 마리아가 머문 곳은, 일반 집의 위층 객실(또는 다락)에 손님(특히 친척)들이 꽉 찼으므로 거기 딸린 현관 겸 아래층 한구석의 양 우리였기가 가장 쉽다는 견해에 그리스 원어와 고고학이 힘을 실어주고 있다. 또는 집 부근에 따로 친 장막, 목자용 동굴 속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마구간이었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없다. 마구간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 하기 쉽지만 성경에 밝혀진 '구유'란 낱말로 족해야 한다.

사족일지 모르나 119장의 '낮고 천한 사람과 사귀시며 사셨다'는 문구도 자칫 그릇된 인상을 낳기 쉬운 말이다. 주님이 빈민과 환자, 세리, 창기 등을 돌보신 것도 사실이지만 알고 보면 구분과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대하셨다. 당대의 상류층인 산헤드린 공회원 니고데모, 거부 아리마대 요셒, 부호이자 공무원인 자캐우스, 유대교 유지인 회당장과 로마군 백부장의 집안사람들도 주님은 돌아보셨다. 주님과 제자들에게 마지막 만찬자리를 제공한 마가 요한의 어머니만 해도 120성도가 한꺼번에 여러 날 머물 수 있는 큰 다락방(객실)이 딸린 저택의 소유자였다.

전설 따라 흐르지 말자. 성경 말씀이 가는 곳까지 가고 머문 데서 머물자. 찬송가의 전설들은 과감히 정리되어야 한다. 분명히 진실이 아닌데도 "곡조가 좋은데" 하고 적당히 간과하고 방관하는 '눈 가리고 아옹' 격이 더 이상 되지 말자.

2007년 12월 3일 월요일

무엇이 진짜 거룩한 음악인가?


거룩의 개념은 전통음악/CCM 같은 형식으로 설정되지 않는다

김삼


많은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 '거룩'의 개념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런 것을 상상의 거룩, 관념 상 또는 감각 상의 거룩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모든 감관들 중 시각이 가장 밝기 때문에 겉 모습이나 어떤 형식이 점잖게 보일 때 "경건하다", "거룩하다"고 표현하기 십상이다.

예를 들어 성경적 또는 기독교적 주제나 가사 또는 비슷한 분위기의 테마를 사용한 음악이나 카톨맄/유대교 음악 등 종교음악 장르의 작품들을 통째로 모두 '거룩한 음악'이라고 지칭하려 든다. 그렇다면, 멘델스존의 교향곡 '개혁'이나 말러의 '부활' 교향곡, 쉔베르크의 '시편 130' 등이 거룩한가, 않은가? 확답이 어려운가?

불가지론자 가브리엘 다눈지오의 극본 '생 세바스티엥의 순교'에 갖다 붙인 자연신론자 드뷔시의 '순교자'는 어떤가? 이런 답은 퍽 쉬울 것이다.

또 확실한 기독교 주제의 음악을 누구나 연주한다고 다 거룩한 음악이라 할 수 있겠는가? 가령 유대교인들이 핸델의 '메시아'를 연주한다면, 거룩한가? 또는 연주 장소가 교회당 또는 성당이라고 해서 거룩하다, 성스럽다고 할 수 있는가?

교회 안에서도 그렇다. '거룩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들을 한다. 현대의 교회당을 '성전'이라느니 강단이나 제대, 주례 장소를 "거룩하다"며 따로 구분해 놓고 어린이금지구역을 삼는 일 등이 그렇다. 사실 어린이는 어떤 어른들보다 더 거룩할 수도 있다!

성령이 충만하던 초기교회에서도 그런 일은 흔했다. 초기 교회 안내위원들이 겉 모습으로 사람 차별하다가 사도 파울에게 외모로 교인 차별하지 말라는 강력한 책망을 들은 예로 보아 알 수 있다.

겉 모습과 표면 차원의 이런 '거룩' 개념은 교회를 죄인들을 초청하는 장소가 아니라 정반대로 죄인을 내쫓는 장소로 만드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언젠가 소위 '재건파'에 속한 어느 장로교회를 방문했다가 "생리 중인 여성도는 주일날 교회에 오면 안 된다"는 얘기를 공공연히 하는 것을 듣고 놀란 적이 있다. 가히 이단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교회는 죄인들이 거듭나서 된 성도가 모이는 장소이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다. 시초부터 거룩했던 자들의 모임이 아니다. 그런 곳에서 표면상의 거룩 개념만으로 사람을 차별하다 보면 죄인들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거룩의 개념은 결코 인간이 설정하지 않는다.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설정된다. 스스로 '거룩한 분'(Holy One)이시며 '거룩케 하시는 분'(야훼메카데쉬)이신 하나님은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서도 거룩하게 하시며 신약/교회시대엔 성령으로 오셨다. 성령님 자신이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이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난 자는 이미 거룩케 됐으나 더 거룩케 되기 위하여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늘 필요하다.

내용이 아닌 형식을 갖고 거룩하다 아니다를 판단하는 경우는 한때 전통적 고전적 교회음악과 CCM을 차별하던 경우에서도 명약 관화해진다. "CCM은 교회음악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식의 말은 CCM은 거룩하지 않고 부정하니 교회음악의 반열에 설 수 없다는 말과 과히 다른 말이 아니다.

CCM의 이디엄/미디엄이 통속적이므로 천하게 보이니까 덜 거룩해 보이거나 아예 거룩하지 않게 보인다는 발상에서일 것이다. 그런 말 속에는 전통음악만 거룩할 수 있고 교회음악의 반열에 서서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개념이 은근히 포함돼 있다. 바로 이런 것이 상상의 거룩, 감각 상의 거룩이다. 영적인 거룩이 아니다.

또 교회에서마다 CCM의 위치가 강화돼 가는 요즘은 CCM은 거룩하고 고전적인 교회음악은 거룩성이 떨어진다는 인식도 덩달아 강화돼 간다. 과연 그럴까?

음악은 오로지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을 때만 거룩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의 어떤 경우도 함부로 "거룩하다" "거룩하지 않다"를 논할 수 없다. 심지어 거듭난 자들만 모여 연주한다고 해도 거룩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 그런 사례를 봤기 때문에 하는 얘기다. 그리고 거룩의 개념은 전통음악과 CCM 같은 형식으로 결코 설정되지 않는다.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는 전통음악인들도 얼마든지 속으로 악을 저지르며 위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제사장들에게 사용된 거룩한 기름은 기름 자체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거룩케 해서 거룩해진 기름이었다. '성가대'는 거룩한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어야 하건만 중세교회 성가대는 귀족 계급의 일부로서 타락한 성가대였다. 형식이 거룩성을 부여해 주지 않음을 웅변해 주는 대목이다.

오로지 하늘의 기름부음을 받는 음악만이 거룩한 음악이다. 이런 거룩의 개념이 바로 이해되는 바탕 위에서 교회음악의 진로를 논할 수 있다. 음악의 거룩함은 죄인들이 그것을 듣고 눈물로 통회하거나 가슴을 치며, 손을 들고 입으로 고백하며 회개하고 거듭나고 다윋이 연주할 때처럼 질병이 낫고, 교회가 성령으로 부흥되는 역사를 통해서 나타날 수 있다.

성령은 주님을 증언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2007년 12월 1일 토요일

좋은 발성을 위한 몇 귀띔 <2>


좋은 몸자세는 발성의 기본

김삼

좋은 발성은 좋은 몸자세와 좋은 호흡을 전제로 한다. 발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선 자세의 문제도 이내 발견된다. 쉬운 예로, 구부정하게 몸을 숙인 사람에게서는 바람직하고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없다. 특히 지적하고 싶은 사항은 대체로 합창연습 때 몸자세가 매우 좋지 않다는 점이다. 있는 대로 편한 자세를 취하고선 좋은 소리가 나올 리 만무하다. 연습 때는 실연주 때보다 기분만 약간 느슨하고 여유로울 뿐, 몸 자세는 연주 때에 준하든지 대등해야 한다.

서서 노래하는 자세로서 가장 이상적인 것은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어깨넓이 정도로 양발을 벌린 위치에서 팔을 위로 쳐들어 자연스럽게 내린 채 한쪽 발을 약간 앞으로 내민 상태다. 이때 등은 똑바로 벽에 기댄 형국이며 [몸을 지탱할 정도의 발힘과, 복식호흡을 위해 숨을 들이마실 때 팽팽하게 버티는 배와 엉덩이를 제외한] 모든 몸 부위에서 힘을 빼야 한다. 특히 턱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유의해야 한다.

최근 어느 중창단의 연주회에 가 볼 기회가 있었다. 여유롭고 순탄한 매너와 발성이 무난했지만, 한가지 매우 실망스런 점이 있었다. 모든 단원들이 앞에다 스탠드를 놓고 악보를 보며 노래하는 것이었다. 단원들의 용모가 더 중요했는지 스탠드는 상당량 아래 쪽으로 내린 채였다. 처음엔 현대적인 중창 '스테이지쉽'을 위한 하나의 패션(?)이려니 생각했는데 끝까지 그러고 있었다.

이럴 경우 스탠드 위 악보를 내려다보려면 눈이 내려가고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내려가게 돼 발성에 무리가 온다. 정기연주회라면, 최소한 그날 부를 (대곡을 제외한) 일반 성가곡들만큼은 모두 암기하고 전적으로 정면을 바라 보며 연주해야 옳다. 아마추어 중창단인 데다 이민생활에 바쁘다 보니 악보 외울 겨를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년에 한 두 번 하는 정기연주회를 위해서조차 악보를 외우지 못한다면 정성이 부족한 것이다.

대곡을 위해 악보를 볼 경우라도 좋은 발성을 위해서는 스탠드를 쓰지 않는 것이 이상적이다. 스탠드를 꼭 써야겠다면, 얼굴이 보일 정도로 눈 바로 부근에까지 최대한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합창단이나 성가대의 연주 때 악보를 보려면, 악보를 쥔 손을 가급적 위로 올려 악보 위 선분이 지휘자의 눈과 거의 마주칠 정도가 돼야 한다. 그러려면 접힌 팔꿈치를 옆구리에 근접시키는 것이 좋다. 단 몸통에 갖다 대면 역시 발성에 방해가 된다. 그것이 지휘자와의 교감과 자연스런 발성에 유리하다.

노래를 할 때는 고개를 쳐들기보다 사진 찍을 때처럼 눈이 정면을 본 상태에서 고개를 약간 숙이는 것이 발성에 유리하다. 그 이유는 첫째, 소리의 초점을 모아 인중 바깥 방향으로 '투사'해주기 위함이며 둘째, 약간 고개를 숙여 입을 벌린 상태에서 성대의 방향이 정면을 향하기 때문에 소리의 전방발사에 유리하기 때문. 이 자세는 특히 음량을 요하는 포르테/포르티시모 발성에 필수적인 자세다.

일부 발성 전문가들은 (발음이나 조음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아래 턱을 길게 내려야 큰 소리가 날 수 있다는 데 거의 동의하는데, 같은 맥락의 얘기다. 그러나 굵은 목소리를 내려고 목을 마구 눌러 발성에 영향을 주면 오히려 해롭다. 그렇게 해서 잘못된 발성 버릇과 소리를 기른 앨토나 베이스를 흔히 본다. 인위적 요소가 많을수록 음악적인 소리가 안 난다.

앉아서 노래를 부를 때는 반드시 허리를 펴고 의자 등판에서 등을 떼야 한다. 특히 연습실의 합창대원들에게 주는 충고다. 이것은 엎라잇/스피넽 등의 피아노를 설치할 때 뒷면을 벽에서 떼어 놓는 것과 같은 이치다. 소리통 즉 공명강이 제대로 울려야 하기 때문이다. 등을 의자에 대고 있는 대로 편한 자세를 취하면, 몸통의 공명이 되지도 않거니와 금방 목소리에 무리가 간다. 장시간 정식 연주를 할 때보다 연습 때 쉽게 목이 쉬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다.
다시..한 번 잔소리 같지만, 좋은 발성은 우선 좋은 자세에서 온다! 이 중요한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평시 훈련과 컨디션

사람마다 기본적인 바탕소리는 갖고 있지만, 때와 환경, 몸 상태에 따라 소리가 변할 수 있다. 오래 전, 지금은 한국 음악교육계에서 활약하는 유명 소프라노에게 이른 아침 전화를 걸었다가 적지 아니 놀란 적이 있다. 꾀꼬리 같은 목청, 옥접시 위를 굴러가는 은방울 소리를 기대했는데, 그지없이 탁하고 메마른 저음으로 응답하는 것이었다.

성악을 부전공한 필자도 경우에 따라 음역과 음질이 달라져 이를 노래에 활용하는 때가 있다. 평소에 못 내던 낮은 저음으로 충분히 내려가 베이스바리톤 같은 소리를 내는가 하면, 경우에 따라 '하이C'의 테너 음이 괜찮게 날 때도 있다.

이것은 훈련에 따라 개인의 음역이나 음폭, 음량을 최대한 활용하고 조절할 수 있다는 간접적인 얘기가 된다. 그만큼 훈련이 중요하다. 친구 목회자 한 사람은 과거 성악공부를 하던 시절, 파바로티의 '하이C' 보다 4도 높은 음까지 자유자재로 냈다. 그의 '비결' 중 한가지는 역기를 든 채 구부린 자세로 발성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성악가 P 모 씨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좀 위험한 방법이다.

아무튼 좋은 발성엔 끈기 있고 센스 있는 훈련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교훈이다. 약간 허스키인 듯한 매력이 일품인 20세기의 대표적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도 한국 리사이틀 때 하루 여러 시간을 연습했다지 않은가. 물론 나이에 비해 무리였지만. 그러나 요즘 교회에서는 그런 발성연습 광경을 보기가 어렵다. 최소한 20분씩이라도 하면 별 손해 볼 게 없는데도 말이다. 이래저래 바쁜 교회 일정의 틀 속에서 쫓기는 성가 연습에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합창발성 얘기

영국 킹스칼리지 대학 합창단 같은 정련된 목청을 들어 보면, 통일돼 있으면서도 개성을 존중하는 소리임을 느끼게 된다. 강압적인 훈련으로 사람의 기를 죽여 통일된 소리를 내는 방법도 있고, 개인의 개성을 되도록 살려 주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소리도 있다. 아무튼 연습과 훈련이 중요하다.

그런데 합창과는 영 조화가 되지 않는, 너무도 독특한 소리가 발견되곤 한다. 이를테면 바이브레이션(비브라토) 빈도가 너무 다르다든가 조금만 소리 내도 표가 나는 희한한 음질 등이다. 필자는 바이브레이션의 경우 1초에 4회 진동이 바람직하다고 교수에게 배웠다.

그런 독특한 소리는 전체에 조화되는 소리로 용해되고 독특한 소리는 절감 내지 희생돼야 한다. 그럴 의사가 없다면 합창단을 떠나야 한다. 차라리 독창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기회도 있다. 대학 시절 필자는 합창 지도교수인 은사의 권고로 성부를 테너에서 베이스로 바꿨다. 테너로서는 너무 튀어나고 고음합창에 어울리지 않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부지휘자로 연주회 전 파트 합창지도를 시킬 때도 베이스 파트를 맡아 했다. 테너를 선호했던 필자는 한때 은사를 원망하기도 했었으나 훗날 바른 결정이었다고 판단됐다.

가장 이상적인 발성은 방언에서

좀 빗나가는 얘기지만, 인간의 목청의 한계는 초자연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방언으로 하는 '영적 찬양'이 그것이다. 저자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은 방언으로 말했다'란 책의 서문엔 방언을 하는 사람이 뛰어난 목청으로 찬양대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사실이다.

필자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한동안 '영적 찬양'을 경험해 봤는데, 뱃속 밑바닥에서 우러나는 듯한 신비로운 소리가 머리 끝까지 올라 가면서 상상도 못할 저음과 고음을 오가는 초자연적 발성이 나곤 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신령한 노래'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신비주의적'이라고 볼지 몰라도 기독교와 성경 자체가 신비다. 교회 자체가 신비다. 그러니 그 지체들이야 오죽하랴.

그런데 방언 노래의 발성은 비클래식보다는 클래식 발성에 더 가깝다. 그것이 필자가 얻은 결론이다.

좋은 발성을 위한 몇 귀띔 <1>


김삼

듣기 좋은 목소리는 누구나의 바람일 것이다. 성악가는 물론, 성가대원과 지휘자, 설교하는 목회자, 일반 교우들까지도 좋은 목소리를 원한다. 홍혜경/조수미처럼 국제적 명성을 떨칠 만한 천부적인 미성과 기량/테크닉을 가진 사람은 드물지만, 사람마다 개성적인 목청을 갖고 있다.

자신의 것을 훈련, 발전시켜 최대한 활용하는 것은 중요하다. 어떤 이들은 무조건 음이 높고 큰 것이 좋은 소리인 줄 알지만, 다양한 성악가들의 노래를 들어 보면 그렇지 않음을 깨달을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음악의 장르가 다원화 된 시대엔, 누구나 개성을 살려 좋은 소리로 개발해 나갈 수 있고 그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소리의 유형

그러려면 자기의 목소리가 음악의 어느 장르에 적합한 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발성법은 크게 두 가지, 클래식 발성과 비 클래식 발성으로 나뉜다. 전자는 일반적으로, 타고 난 울림소리와 울림 폭, 음량 등을 중시하여 최대한 활용하는 기법이다. 또 좋은 떨림(vibration)이 필수적이다. 거기 비해 후자는 대체로 음질과 개성 살리기에 더 치중한다. 한편 서구적 발성과 국악적, 민속적 발성도 서로 구분될 수 있다. 요즘은 한국의 판소리도 서구인들에게 퍽 어필되고 있다.

전통형 성가대는 클래식 발성을 쓰는 반면, 경배찬양 팀은 비 클래식 내지 세미 클래식 발성을 하는 예가 많다. 예를 들어 비교해 보면, 리릭 소프라노, 콜로라투라, 드러매틱 소프라노 등 가곡/오페라 가수들은 클래식 발성이다. 그런가 하면 복음성가사들 중에도 송정미/박종호 선교사나 세속가수 조영남 씨 등은 세미 클래식에 가깝고, 윤형주 장로는 보다 더 비클래식에 가깝다.

우리네 동양계엔 세계적인 성악가가 드물다. 한 마디로, 서구적 발성법 교육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다. 또, 동양인의 몸 구조는 발성학 상 서양인보다 불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선지 동양인들 중엔 미성과 맑은 소리는 많은데 깊고 그윽한 소리는 드물다. 말 소리만 들어봐도 얕은 '생소리', '밭은소리', '째짐소리'가 많다. 그런가 하면 나의 은사 한 분은 평소 말소리는 물론 웃음소리만 해도 깊고 발성적이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서구인들의 말 소리는 대체로 공명이 잘 된다. 꼭 체구가 더 커서만은 아닐 터. 우선 코가 크고 길며 앞 얼굴보다 옆 얼굴이 긴 서구인들의 머리 구조는 공명강이 평균적으로 동양인들보다 넓다고 할 수 있다. '공명강'이란, 소리의 울림이 이뤄지는 구멍들을 말한다.

성대가 자리잡은 목에 인접한 사람의 머리 부분엔 공명강이 많다. 해골을 보면 실감이 갈 것이다. 물론 몸의 다른 부분에도 공명강이 있다. 흉강(가슴통)과 복강(배) 등이다. 음악엔 도움되지 않지만 거창한 트림 소리는 복강과 흉강, 식도 등이 위아래로 한꺼번에 트이는 듯, 굵은 파이프 같은 소리다.

라디오에서 종종 미국 교계 남성 성악가들의 클래식 찬양곡을 듣노라면 굉장히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더구나 둘이서 비슷한 발성으로 남성 이중창을 할 때는 금방 라디오를 꺼 버리게 된다. 미성인데도 탁 트이질 않고 입 속으로 옹그리고 뭉친 듯한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출발부터가 자연적인 발성이 아니다.

가장 이상적인 발성법의 하나가 물론 '벨 칸토' 창법이다. 이탈리아가 역사 속에서 자랑해온 이 창법의 특징은 투명성, 완벽한 일관성과 자연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저명한 벨 칸토 소프라노가 오래 전 작고한 조운 서덜랜드 말고도 아프리칸계인 캐틀린 배틀(Kathleen Battle)이 있다. 특히 비가풍의 가락에서 더 윤택이 난다. 그녀의 노래를 듣노라면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공명강들을 최대한 울려주는 것이 좋은 발성의 지름길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결코 큰소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성대를 중심으로 소리를 내면서 공명강을 최소로 활용할 때 나는 소리가 '생소리'(말소리란 뜻으로 '화성'이라고도 한다)다. 그런가 하면, 일반적으로 '발성된' 사람의 울림소리를 머릿소리(두성)와 가슴소리(흉성)로 구분한다. 가슴이 작은(새가슴) 어린 시절엔 구성(입소리), 두성이 발달하지만, 가슴근육과 흉강이 발달하는 사춘기를 지나면 변성기와 함께 흉성도 발달한다.

음역에 따라서도 두성과 흉성이 구분된다. 대체로 높은 음으로 올라갈수록 두성, 낮은 소리로 내려갈수록 흉성에 의존하게 된다. 두성이라고 해서 머리와 목부분만 사용하는 건 아니다. 높고 힘차고 화려한 소프라노나 테너 소리를 낼 때, 몸 전체로, 특히 탄탄한 배 힘을 살린 호흡으로 팽팽히 받쳐 줘야 한다. 클래식적 의미에서 좋은 발성과 좋은 노래는 좋은 호흡과의 합일을 위한 '전쟁'이다.

웃음과 하품과 허밍

성악가들의 표정을 보면, 웃는 모습으로 보일 경우가 많다. 그것은 머리의 공명강을 최대한 넓히면서 소리의 초점을 모으기 위해서다. 실제로 크게 웃을 때 공명이 잘 되는 예가 많다. 하품 때와도 통한다. 하품하는 표정은 웃는 얼굴의 움직임과도 비슷하다. 하품할 때 소리를 내 보면, 머리 속의 모든 공명강이 트이고 열리고, 소리가 관통하면서 머리 속은 물론 가슴까지 온통 진동하는 걸 느낄 것이다. 가장 잘된 공명이란 증거다.

하나님이 내신 다양한 생리현상들 중 가장 신기한 것 한 가지가 이 하품이다. 산소를 최대한 순간흡수하기 위해 턱뼈가 자동으로 움직이고, 윗턱과 아랫턱이 있는대로 한껏 벌어지고 입술과 구강이 동시에 활짝 열려 코와 입으로 산소를 들이마시고 탄산가스를 내뱉는 것이다. 마치 고래가 바닷물을 들이켜 수많은 크릴새우를 한꺼번에 삼킨 뒤 물을 내뿜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하품소리와 가장 닮은 인위적 발성이 허밍(humming)이다. 이상적인 허밍은 하품하는 포즈로 입만 다문 상태와 가장 가깝다. 이때 혀는 자연스럽게 바짝 낮춰 구강 바닥에 깔면서 혀끝은 치열 안쪽에 댐으로써 구강을 최대한 넓혀 준다. 그래야 허밍이 아닌 '흐밍' 즉 옅은소리, 밭은소리를 피하게 된다.

허밍 상태에서 소리의 초점을 바꿔 가며 소리의 전방발사(projection)와 좋은 발성, 발음 기법을 함께 익힐 수가 있다. 아울러, 허밍할 때 높은 소리로 올라 가면서 가슴보다는 구강과 머리가 더, 낮은 소리로 내려가면서 가슴 쪽이 더 진동되는 걸 느낄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허밍은 가장 좋은 발성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찬양대가 연주 외에 평소 연습과 발성훈련을 할 때 허밍을 자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시기 상황에 따라 합창연습 시간이 짧을 경우, 자연스러운 허밍만 해 줘도 좋은 워밍엎이 된다. 이때 입 속에 큼직한 복숭아를 넣었다고 가정하고 입을 벌리도록 귀띔한다. 허밍할 때 숨을 비강(콧구멍) 쪽으로 옮기면, 콧소리(비음)가 유난히 난다.

입을 열어 보면 표가 난다. 허밍을 통해 발성을 계발해 나갈 때 유의할 것은 콧소리를 피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허밍으로 발성을 잘못 배워 콧소리를 섞어 가며 노래하는 성악가들이 퍽 많다. 비음이 심한 성악가는 음악계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입증된다. 허밍에 있어 또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음량이나 길이 등에 무리해선 안 된다는 것. 필자의 경험으로는, 허밍 연습이나 연주를 오래 하는 것은 효과 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허밍은 바른 발음에도 크게 도움된다. 특히 한글 받침소리 이응(ㅇ)과 미음(ㅁ), 니은(ㄴ)의 바른 울림에 허밍의 울림소리와 소리의 바른 초점잡기가 기초가 돼야 한다. 발음과 조음(articulation)에 대해서는 딴 기회에 자세히 다루련다.

허밍은 연습 때만 아니라, 실제 연주에도 활용된다. 가사 없이 소리만 내는 허밍 합창은 언제나 듣는 이들에게 신비감을 준다. 독창에 곁들여지는 무반주 배경음악으로도 자주 쓰인다. 물론 반주를 곁들여도 나름의 효과가 있다. 이때 모든 성가대원의 공명의 위치 내지 소리의 초점이 동일해야 완벽에 가까운 허밍의 조화가 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