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30일 금요일

교회음악의 가사 전달


김삼

몇 년 전 한국서 휴가를 보내며 경향 각처의 몇몇 교회를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한국 교회음악은 필자가 이민을 오던 20여 년 전에 비해 크게 발전했다. 발전의 주된 에너지는 테크닠 및 표현의 이중적 발전과 창작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일반음악 면에서, 과거 한국음악은 테크닠은 좋지만 표현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그러나 국제 음악 환경에서 연구 활약하던 유능한 음악인들이 한국 음악계 전반에 고루 진출해, 서울과 지방 사이의 골이 메워지고, 교회도 이들을 적극 수용하면서 테크닠과 표현이 '평준화'돼 가고 있다.

창작 면에서는, 국제저작권법이 한국에서도 제대로 발효되어 서구교회음악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체 곡 개발에 힘쓰게 되면서 나름의 좋은 곡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최근 방한 당시 몇 교회에서 들은 곡들이 그러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각처에서 그렇듯, 한국도 전통 교회음악과 CCM 내지 현대 경배찬양곡의 병존 현상도 두드러진다.

크고 작은 교회들이 두 가지를 병행하고 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교회 존립에 지장을 받을 수 있다고 느끼는 듯 했다. 그러나 전통적 음악과 CCM 사이의 벽은 아직도 두텁다. 찬양대와 CCM은 늘 서로 독립돼 있고 때로는 서로를 경원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한국 교회음악이 전반에 걸쳐 평균적으로 국제 수준으로 떠올랐냐면, 그건 아니다. 교인수 약 3만인 어느 수도권 교회 찬양대가 펴낸 최신 음반을 입수해 들어 봤는데, 유감스럽게도 졸작으로 느껴졌다. 미국 음대 출신의 지휘자가 100여 명의 성가대와 오케스트라를 감독/지휘를 했는데, 지휘자 자신의 특징 견식이나 레퍼토어에 제약 받았는지, 선곡이 자유롭지 못해 전반적으로 답답하고 이렇다 할 감흥을 주지 못했다.

화려하고 영롱한 클래식 합창성가곡을 간간히 펼쳐 부른 것도 아니고 좀 난해한 현대 합창곡을 삽입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두루뭉실했다. 다만 성가대의 합창 실력은 상당했고 오케스트라도 수준급이었다. 모처럼 만드는 음반을 과연 이 정도 '적당 수준'의 레퍼토어를 갖고 막대한(?) 돈을 들여 가며 해야 했을까? 교회 홍보용으로도 마이너스에 가깝다고 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특히 실망한 건, 녹음과 출반 수준. 가사도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고 허공중의 웅얼거림처럼 맴돌 뿐이었다. 제목만 갖고 짐작할 뿐이지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길이 없다. 가사 모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마디로 CD 주얼케이스 속 재킷 디자인만 근사할 뿐이었다.

이 참에, 한국과 한인 교회음악인들에게 충고하고 싶은 것이 있다. 교회음악에서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닌, 텍스트의 표현(articulation)이다. 순수기악을 제외한 성악의 경우, 성경말씀이나 신앙고백에 가까운 가사를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교회음악은 거의 무의미하다.

소리는 극명해야 한다. 성가대는 회중에게 가사전달을 제대로 하기 위해 할수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음대에서 배우는 외국어 발음법을 한글에도 잘 적용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아멘', '영광' 등 한글받침의 여운 처리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외국 지휘자나 발성교수, 음악목사 등이 매우 철저히 다루는 부분의 하나가 가사의 articulation이라면, 한국의 찬양대/교회합창단 지휘자들이 대체로 가장 소홀히 하는 분야라는 점이다.

소리들 중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음악에 치여, 부르고 듣기에 흐리멍덩한 소리로 사라져 버리는 셈이다.

선거후보나 정치가의 생명은 확실한 연설이다. 고도로 의사전달이 훈련되고 잘 준비된 정치후보나 연사들처럼, 노래 가사의 전달도 분명해야 한다. 지휘자는 성가연습 중 수시로, 귀가 잘 발달된 대원을 시키든지, 아니면 본인이 직접 떨어진 거리에서 가사 발음을 들어보고, 잘 분별되지 않는 자음과 모음 발음은 몇 번이고 연습시켜야 옳다.

찬양이 '짜냥', 천국이 '청국', 사망이 '야망'으로 들려선 안된다. 그래도 가사 전달은 완벽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협력을 받아 되도록 매 주일의 성가 찬양곡 가사를 주보에 실어야 한다. 주보에 성가가사를 꼬박꼬박 실어주는 자상한 목회자야말로 교회음악과 찬양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는 바람직한 사역자이자 든든한 후원자다.

주보에 공간이 부족하면 사이종이(간지)로라도 끼울 수 있다. 성가음악회, 칸타타연주회 때도 수고스럽겠지만 순서지에 가사 전체를 실려야 옳다. 특히 음반을 낼 때는 절대로(!), CD 재킽 북에다 모든 낱곡의 가사를 수록해야 한다.

"하나님께 직접 바치는 것이므로 회중은 가사 내용을 몰라도 된다"는 발상은 엄청 잘못된 것이다! 교회는 회중 중심이지, 성가대나 지휘자 중심이 아니다.

'아멘'의 발음을 다시 살펴 보자. 흑인영가 등 특수효과를 위한 순간 받침처리의 특수효과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아멘'의 '멘'은 '메---ㄴ'식으로 모음 'ㅔ'를 늘여준뒤 (적당한 길이의 미분이 가능한) 마지막 음표에서 니은 받침('ㄴ'/n)의 여운을 확실히 처리해줘야 한다. 다른 받침소리도 이에 준한다. 이를테면 온음표의 경우 4분음표, 2분음표일 경우 8분음표 단위로 나눈 마지막 음표에서 마무리하는 식이다.

곡의 끝에 붙은 장박 아멘인 경우 물론 'ㄴ'(n)도 상당량 길어진다. 그것은 은은한 메아리와도 같다. 그러기 위해선, 지휘자가 'ㄴ'의 순간을 손으로 섬세하고 미묘하게 표시해 줘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 주는 지휘자가 그리 흔하진 않다. 이 사인을 해 줄 때 성가대원 중에는 아예 허밍을 하여 'ㄴ'이 아닌 'ㅁ'에 가깝게 발음하는 대원도 있다. 그러나 'ㄴ'(n)은 입술이 약간 벌어지고 입천장에 혀가 붙는 반(half) 열림소리 내지 '절반 허밍'의, 완벽한 것이어야 한다.

미음받침 'ㅁ'과, 허밍에 가까운 이응받침 'ㅇ', 니은받침 'ㄴ' 등 반열림소리들은 평소 고도의 훈련을 요한다. 허밍은 그야말로 허밍이어야지, 입천장이 낮은 '흐밍'이 돼선 안 된다. 입 속에 호두알을 문 양 구강을 최대한 열고, 혀끝은 아래 치열에 납작하게 대면서 소리의 초점을 바깥 인중 쪽으로 쏘아 내듯 튀겨 주는 것이 이상적이다. 이럴 때 입속 코 근처 부분이 떨리거나 간지러운 사람들도 있다. 화살처럼 순간 액센트를 넣은 허밍과 부드러운 허밍을 둘다 연습하도록 한다.
허밍과 두성의 가장 완벽한 훈련 한 가지는 하품을 일부러 해 보는 것이다.

회중 찬송 이끌기

김삼


강단에 서서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은 찬송가나 기타 노래도 마이크 앞에서 크게 부르기 때문에 결국 회중찬송도 이끌어 가는 셈이 된다. 익숙한 찬송가는 대부분 무난히 부를 수 있겠지만, 자주 부르지 않는 찬송가 또는 평소 잘 불렀더라도 멜로디를 잊어 버리는 경우 부득불 틀리게 부르게 된다.

목회자나 예배 인도자가 찬송가를 곡조에 맞지 않게 부르는 광경을 자주 본다. 특히 곡조 위아래가 거의 같은 멜로디의 형식인데 약간 달라서 혼동될 경우 그렇다. 또, 인도자가 소위 '음을 다스리려는 사람'(음치)이면 원음보다 반음이나 한음 정도 높낮이가 다르거나 또는 반주에 전혀 맞지 않는 엉뚱한 음으로 부를 수 있다.

그럴 경우, 독보(악보읽기)나 음에 익지 않은 성도들은 인도자가 잘못 부르는 찬송가를 잘못 따라 가면서 잘못 배우게 된다. 특히 평소 잘 부르지 않던 찬송가를 무리하게 부를 경우 그렇다. 필자가 그랬다면, 솔직히 하나님께나 교인들, 방문객들 앞에서 송구스럽거나 망신살로 느껴질 것 같다. 더 큰 문제는, 틀리고도 자신은 전혀 모르고 틀린 대로 태연하게 힘차고 씩씩하게 불러 나가는 경우다.

모름지기 예배 인도자는 그 날 예배를 위해 미리 잘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 성가대는 다음 주일 특별찬양을 위해 미리 꼬박꼬박 리허설하게 시키면서, 찬송가에 익숙지 않은 예배 인도자가 다음 주일 예배 때 부를 찬송가를 미리 연습하지 않는 것은 넌센스다.

인도자는 물론, 모든 예배관계자들, 음악사역자들은 적어도 다음 주일 회중찬송가를 미리 몇 번 정도 불러 보는 성의를 기울여야 한다. 멜로디가 익숙지 않은 찬송가는 틀리지 않게 부를 수 있을 때까지 연습을 해야 옳다. 또 임의로 즉석에서 선곡하는 곡의 경우 멜로디에 자신이 없으면 잘 준비된 사람에게 이끌게 해야 한다. 무리하게 나서서 이끌면 예배 분위기를 흐린다. 예배 이끔이가 자신의 서투른 찬송가를 남이 "은혜롭게" 들어 주길 바라는 것은 일종의 청중 학대 행위나 같다. 간증시간 도중이라면 혹 모를까.

CCM은 구성지게 잘 불러 젖히면서 찬송가는 터무니 없이 적당히 부르는 사람도 없지 않다. 매주 예배 전 미리 찬송가를 연습할 만한 여유가 없다면, 기독교 서점에 흔해 빠진 찬송가(녹음) 전집이라도 구입해서 해당 찬송가를 몇번이고 듣고 따라불러야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게으름' 이라고 할 밖에.

예배 때 부를 만한 찬송가들은 평소 미리 익히는 것도 중요하다. 마치 끼니 때마다 양치질을 하듯, 평시에 공적, 사적인 장소에서 찬송가마다 정확하게 부르는 습관을 길러 두면 좋다. 독보법(악보를 읽는 법)을 배우면 더욱 좋다.

잘 연습을 했더라도 강단에 서면 멜로디를 잊어먹거나 도무지 음에 맞게 부를 수 없는 사람도 간혹 있다. 그런 교회는 예배 인도자 자신이 마이크로 찬송가를 이끌어 갈 게 아니라, 정확하게 잘 부를 수 있는 사람을 내세워 회중찬송을 이끌게 해야 한다. 그것이 정석이다.

찬송가를 정확히 잘 부르지 못하면서 단지 목회자, 인도자란 이유만으로 평소 연습도 없이 무리하게 회중찬송을 리드하려는 것은 독단에 속한다.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예배음악 사역자는 왜 고용했는가.

그리고 인도자가 워낙 음악에 소질이 없으면 모르되 평소 잘 부르다가 어느날 예배 때 잘못 불렀다면 그 찬송가 멜로디는 일반교우들에게도 까다롭다는 얘기다. 회중찬송가 멜로디는 평균적으로 무난히 부를 수 있도록, 쉬운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음악목사, 성가대, 지휘자, 반주자 등 교회음악 사역자는 단지 특별찬양 준비와 연주에만 힘쓸 것이 아니라, 일반회중이 찬송가나 복음성가, 경배찬양을 바로 부를 수 있게 하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옳다.

회중찬송 수준은 저급한데 성가대만 잘 하면 무슨 소용인가. 그거야 말로 종교개혁 원인의 하나였던 사제/성가대 귀족화인 것이다. 그것 때문에도 마르틴 루터는 교회음악 개혁도 부르짖고 나선 것이다. 루터는 제대에 섰던 성가대를 일반회중 사이에 앉혀 함께 부르게 했다.
신약시대 성가대나 찬양팀은 귀족이나 사제 계급이 아니라 회중의 일부다. 그러므로 따로 특별찬양만 할 게 아니라 회중찬송도 이끌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예배인도자나 목회자는 미리 음악사역자와 함께 찬송가를 연습하여 예배 때 틀리지 않게 부르든지, 평소 독보법이나 찬송가 부르기를 익혀 불시에 당황하지 말든지, 자기 대신 더 잘 부를 사람 즉 지휘자나 성가대원을 마이크 앞에 세우든지, 회중찬송 때 아예 마이크 앞에 서지를 말든지 해야 할 것이다.

바람직한 찬송가 반주 방식


김삼


혼성4부 합창 형식으로 된 찬송가 악보를 그대로 치는 것은 반주의 의미가 없다. 그것은 1개 화음을 위해 10개의 손가락들 중에서 4개만 사용한다는 뜻이다. '건반 위에서의 합창'일 망정 반주는 아니다.

한인교회에서의 회중찬송 반주 양태를 크게 3 종류로 나눠 볼 수 있다.

1. 찬송가 악보를 거의 그대로 친다.
2. 찬송가의 원 화성 진행을 대부분 무시하고 적당히 친다.
3. 원 화성 진행을 중시하되 폭넓게 편곡해 가며 친다.

위에서, 3이 바람직하다. 위 1.의 경우, 반주가 아닌 독주나 간주 등에서 일시 합창 효과를 낼 때는 괜찮다. 특히 오르간이 그렇다.

성가대가 사용하는 무반주(a capella) 합창곡, 즉 4 성부를 파트 별로 한 줄씩 네(4) 줄로 나열한 합창총보(score) 아래, 역시 4성부로 된 작은 건반악기 악보를 흔히 본다. 거기 '연습용'(for rehearsals only)이란 말이 딸려 있다. 반주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부 연습을 위한 것일 뿐이다.
무반주 합창곡에다 구태여 반주를 넣겠다면, 제대로 편곡해 가며 반주답게 연주해야 한다. 반주자의 역량이 필요하다. 아니면 되도록 지휘자가 편곡을 해줘야 한다.

위에서 2.의 경우도 바람직한 반주는 아니다. 이 방식을 쓰는 반주자들은 혹 독보를 제대로 하지 못해 화음을 무시하거나 처음부터 원 화음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하는 두 가지 경우다.
특히 재즈나 락, 경배찬양 등 '경음악' 식 반주 스타일에 흔한 반주법이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재즈 화음(또는 기타코드)을 쓰더라도 원 화성에 붙여 분석하여 붙일 수 있는데도, 귀찮아서 하지 않는 때가 많다. 요즘은 기타코드가 붙은 찬송가도 나와 있다.

특정 찬송가의 작곡가가 본래 의도한 오리지널 화성과 조성은 성도들이 어릴 때부터 귀로 익혀 기억 속에 간직돼 온 것이다. 따라서 각 찬송가에 나타나는 화음 진행 순서를 주요 화성을 중심으로 최대한 존중해서 반주해야 한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도 낱낱이 원곡의 각 화음에 충실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적극적 의미의 찬송가 편곡이 불가하다는 말이 돼 버린다.

찬송시에 곡을 붙이는 작곡가는 주어진 가사 중 주로 1절을 갖고 멜로디와 화음을 붙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주로 1절 가사의 분위기/정서에 맞춰 화성 진행이 돼 나간다고 봐야 한다. 우리가 어떤 노래를 애창할 때 거기 붙은 특정 화음의 매력 때문에 좋아진 예가 많다. 그 화음을 무시하고 엉뚱한 화음을 붙이는 경우 기분이 전혀 바뀌어 버릴 수도 있다. 그 정도로 사람의 화음감각은 예민하다.

성가대를 위해 찬송가를 편곡한 합창곡에서 효과를 위해 오리지널 화음이나 조성을 적당히 무시할 수는 있다. 이를테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에서 중간부분을 단조로 바꾸는 것 등이다.

그러나 회중찬송가를 위해서는 작곡가가 원래 붙인 화음의 주요 흐름을 되도록 따라 주는 것이 좋다. 더욱이 회중 가운데는 어릴 때부터 4부 합창의 한 파트를 배워 익숙하게 부르는 교우들이 적지 않다. 그럴 경우 전혀 다른 화음이 계속 튀어 나오면 기대감이 깨어져 화성으로 부를 마음마저 사라진다. 그러나 예배 도중 회중 찬송 순서에서 다같이 유니슨으로 잠재적인 합의가 있을 때 온갖 화음을 동원한 반주가 있을 수 있다. 특히 오르간이 그렇다.

오르간/피아노/키보드/관현악단/밴드 등이 동시에 찬송가 반주를 할 때는 더더구나 원곡의 화성 진행을 무시하고 자유자재로 화음을 바꾸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혼자 반주할 경우라도 이에 준하는 것이 좋다.

이제 위 3.의 방식을 좀 더 풀어서 얘기해 보자. 효과적인 반주를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찬송가의 상3성부(세 윗소리 즉 소프라노/앨토/테너 음)는 오른손으로 다 커버하고, 저음부인 베이스 파트는 왼손으로 1옥타브(8va.) 아래를 곁들여 8도 병행한다는 것은 웬만한 반주자들은 다 아는 상식이다.

이럴 때 왼손은 마치 오르간에서 페달 음을, 관현악에서 첼로 군에다 더블베이스(콘트라베이스)군을 곁들이는 것 같은 중후한 효과를 낸다. (물론 오르간 페달이 찬송가의 베이스라인을 따라 항상 8도 병행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좋은 주법이 아니다).

반주자가 찬송가의 4성부 악보로만 따라 치다 보면, 테너와 베이스 성부가 1 옥타브 이상 벌어질 때 커버하지 못하게 된다. 그럴 때 4 성부 중 어느 하나를 일시 빠뜨리는 반주자들을 자주 본다. 특히 삼화음 중 결코 빠져서는 안 될 제3음(예를 들어 5도 화음 '솔시레'에서 '시'에 해당)을 빠뜨리면 "이 빠진" 소리가 난다. 그런 반주자는 상3 성부를 오른손으로 치는 주법을 익히면 필수 음을 빠뜨릴 염려가 없다.

상3 성부를 오른손으로 치고 베이스를 왼손으로 8도 병행하는 주법은 베이스가 강해지는 장점이 있는 반면, 멜로디를 비롯한 나머지 성부가 상대적으로 약화된다. 이런 반주에 익숙한 사람은 따라서, 베이스 반주를 다른 성부보다 비교적 음량(volume)을 작게 치는 것이 좋다.
그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이 있다. 오른손으로 치는 3성부에서 멜로디 즉 소프라노 부분을 베이스처럼 8도 병행시키는 방법이다. 그럴 경우 오른손의 네 손가락, 또는 다섯 손가락을 모두 활용하는 경우가 많게 된다.

즉 멜로디를 다섯 손가락 중 바깥 쪽 두 손가락으로 동시에 치면서 가운데 세 손가락으로는 중음(가운데소리 즉 앨토/테너)을 커버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빠른 템포의 찬송가인 경우 계속 8도 병행을 해 나가기는 어렵기 때문에 적당히 조절해야 한다.
편곡된 찬송가 반주곡을 유심히 살펴 보면, 늘 멜로디를 8도 병행 하지는 않거나, 중음 부분을 생략시킨 채 (멜로디만) 8도 병행하는 경우가 잦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계속 중음을 생략하면 역시 '이 빠진' 결과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손에 무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특히 동양인들은 평균적으로 서양인들보다 손바닥이 상대적으로 좁고 손가락이 짧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건반악기는 원래 서양인들을 위한 악기였다는 걸 잊지 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양인 현악 독주자는 많아도 유명 피아니스트는 드문 까닭이 바로 그 때문이다(혹 생각 있는 악기 제조업자들은 동양인 손가락 사이즈를 위한 피아노를 개발해도 괜찮을지 모른다).

위 3.의 방식을 쓰는 반주자가 서구교회엔 매우 많은데 한인교회에 많지 않은 이유는 연습이 부족하거나 연습이 귀찮거나 손이 작아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찬송가 편곡 반주곡, 독주곡을 잘 활용하면 가장 좋은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뛰어난 반주자는 오케스트라와 같은 효과를 낸다. 그렇다 해서 항상 화려하게 펼친 분산화음으로 1-4절까지 계속 쳐 대는 것은 좋지 않다. 아래에, 바람직한 반주에 꼭 필요한 몇 가지 제언을 해 둔다.

찬송가 1,2,3,4절을 각각 다르게 반주해 보도록 노력한다. 단 주요 화성진행은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가끔 옥타브 위 높은 음으로 반주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아래의 낮은 음으로만 계속 치는 것은 좋지 않다.

화성으로만 치지 말고 때로는 찬송가 한 부분의 멜로디를 양손으로 치면, 회중의 가사와 멜로디를 동시에 강조해 주는 효과가 난다.

한 마디를 거의 또는 다 차지하는 장음(온음표와 같은 긴 음)의 경우 건반 아래 쪽에서부터 위쪽으로 오르내리는 화려한 스케일의 분산화음을 활용하되 곡의 분위기에 맞춘다. 단, 너무 자주 사용하면 되레 역효과가 날 수 있다.

멜로디가 서서히 진행되는 찬송가의 경우 블럭코드(block chords)를 활용하면 매우 효과적이다. '블럭코드'란, 화음묶음을 건반 옥타브 아래 위로 오르내리면서 울려 주는 방법이다. 이때 원칙적으로 5,8도 병행은 피하는 것이 좋다. 균형이 깨지기 때문이다.

행진곡조의 찬송가는 화음 안에서 스타카토 주법을 자주 활용한다. 일례로, '믿는 사람들아'(389장) 같은 경우 시작 부분의 베이스 진행을 (후렴처럼) '도, 솔, 도, 솔...' 식으로 가볍게 스타카토로 쳐 주면 매우 효과적이다. 물론 항상 이 방식으로 하면 지루하다.

일정한 화음이 2 마디 이상 지속될 경우, 건반 위 같은 위치에서 당김음(싱코페이션/강박에서 짧은 음이 앞서는 경우. 예: 8분음표+4분음표+8분음표)코드를 반복해서 치면 현대적인 효과가 난다.

3화음이 포함된 7, 9, 11 화음을 활용하고 '화음밖의 음'(불협화음)을 적시적소에 활용하면 효과가 증대된다. 예를 들어 뒤에서 해결해 주는 지속음(suspensions)이 그렇다. 단,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진행되는 화음은 찬송가 반주에 적절하지 않다. 찬송가는 본래 서양 전통음악이란 점을 잊지 말라.

참고로 미국인교회 반주자들을 보면, 익숙한 오르간 반주자는 3,4절 사이에서 간주로 조옮김(이조)을 하여 마지막절에서 분위기를 밝게 고조시켜 마무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드물다.
또 전통적인 미국교회 다수는 찬송가 한 절 전체를 모두 전주해 줌으로써 멜로디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 미리 분위기에 젖어 들게 해 준다. [요즘은 미국교회도 거개가 현대화 돼 간다.] 전주의 가치를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인교회는 친교/오찬 등 시간 관계 상 전주를 짧게 해 버린다. 교인들이 자연히 얼렁뚱땅 허둥지둥 따라가기 마련이다. 회중찬송이 예배나 설교의 '장식품'에 불과한가?

특히 한인 중대형교회는 목회자나 회중의 바람에 따라 모든 찬송가를 빠르게 달려 가듯 부르는 습관 내지 타성이 붙어 있다. 각 찬송가의 개성을 죽이는 행위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더 느리게 명상적으로 불러야 할 찬송가가 많다. 역으로, 찬송가마다 느리게 질질 끌면서 부르는 것도 분위기를 죽이는 결과를 낳는다.

음악의 해석은 전문가가 해야 정확하고 권위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음악교육과 음악대학은 왜 있는 것이며 교회음악인은 왜 존재하는가? 왜 비싼 비용으로 교회음악인들을 고용하는가?

오르간과 피아노로 동시 반주할 경우, 오르간의 음량이 너무 커서 피아노 소리가 죽어선 안되며, 피아노는 되도록 건반 전체에 폭넓게 펼쳐 '오케스트라' 효과를 내도록 한다. 오르간과 피아노가 동시에 거의 찬송가 악보 그대로 하는 반주방식은 서로 다른 악기를 둘다 죽이는 결과를 낳는다.

예배 때의 박수 이야기



김삼

예배 때 사람에게, 또는 하나님께 박수갈채를 하는 교회가 매우 흔하다.박수엔 여러 가지가 있으므로 경우에 따라 손뼉치기를 금하거나 허용돼야 한다고 필자는 본다. 그 조절은 목회자 또는 리더에게 달렸다.

예배 중 손뼉을 쳐도 좋은 경우는 음악적인 박수다. 리드미컬한 찬송가를 부를 때이다. 2, 4 박자와 빠른 6박자 등 비교적 활발한 곡으로서 짝수 계열인 것은 박수가 무난하다. 그러나 속도도 빠르지 않은 3박자 곡을 갖고 박수를 친다는 건 넌센스다.

더욱이 예배중 성령님이 민감하게 역사하시는 경우는, 박수를 즉시 관둬야 한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어깨 위의 비둘기가 훌쩍 날아가듯. 그러므로 교회음악 사역자는 기도로 준비하여 예배 중 성령의 흐름에 극히 민감해야 한다.

예배 중 그 외의 박수는 당연히 삼가야 한다.
가장 잘못된 박수는 예배 도중 인간을 향해 갈채하는 경우다. 성가대가 찬양을 잘 했다고, 독창자가 특송을 잘 했다고, 설교자가 설교를 은혜롭게 한다고, 특정 인사가 방문했다 해서 박수를 치는 것은 잘못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므로 전적으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독창자가 찬양을 하고 나서 청중에게 절을 하고 청중이 박수갈채를 하는 것은 세상과 다름없는, 인간과 인간끼리의 '영광 교환' 행위다. 교회의 박수라고 해서 뭐가 다르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우리 교회를 방문했다고 그에게 기립박수를 하는 것은 하나님 보다 그를 높이는 격이 되고 만다. 그렇다 해서 "우리 하나님께도 또 박수를 보내죠!"하면서 손뼉을 올려치는 건 더 우습다. 부시와 하나님을 경쟁시키는 것도 아니고, 마치 아이들을 격려하고 칭찬하기 위해 손뼉을 치는 것과 다름 아니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예배 드림이 확실하다면, 그렇게 대상이 고정됐다면, 모든 영광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옳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에 어느 누구 인간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이 가로채는 행위임이 틀림없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행위다.

"하나님께 박수를 쳐 드립시다" 란 말도 알고 보면 우스운 얘기다. 인간을 추켜 주고 인간을 상찬하는 행위를 하나님께도 쓴단 말인가! 박수는 남을 격려해주는 외에 공적인 분위기 조성에도 쓰인다. 공산당의 경우가 그렇다. 그런 박수를 하나님께 쓴단 말인가.

하나님께 올바른 영광을 돌리는 법은 손뼉을 치는 것이 아니라 손이나 팔을 들거나 치켜 올리는 것이다. 두 팔을 치켜 듦은 하나님께 나 자신을 맡기고 또 모든 영광을 돌림을 상징한다.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안길 때도 이 자세를 쓴다. 어린이가 가장 일찍 배우는 자세의 하나가 부모를 향해 팔을 드는 자세다. 그렇지 않으면 안기지 못할 줄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아버지 하나님께 안기기 위해 팔을 펼쳐 드는 훈련이 필요하다.

성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 한 가지가 몸의 자세다. 호흡하기 가장 적절한 자세는 바로 서서 팔을 쳐 들었다가 흐트리지 않은 상태로 팔을 내린 상태. 긴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노래를 하는 것은 호흡기관과 몸에 부담을 안겨주며 공명이 되지도 않는다.
엎라잍, 스피넷 등의 소형 피아노를 설치할 때 벽에 붙여 두지 않고 뒤에 공간을 두고 설치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몸도 의자에서 등을 떼어 곧추 앉아야 목소리가 공명된다.

역으로 말하면, 팔을 쳐 든 자세가 인간에게 가장 좋은 자세요, 하나님께 승복하는 자세요, 그 분을 기리고 송축하는 자세다. 그러나 많은 교회가 팔 들기를 싫어하고 거부한다. 하나님께 안기기를 싫어하는 건 아닐까?

"시편에서도 손뼉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용어가 나오는데 무슨 소리냐" 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편에서 쓴 박수는 당시의 음악 미디엄으로서 숨쉬는 곳 등을 표시할 때 가끔 사용됐다. '제금'이란 타악기도 그런 곳에 사용된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의 박수는 음악적인 박수였지, 오늘날처럼 하나님을 추켜 드리기 위해 한 박수갈채가 아니다. 또 다른 박수 언급은 사뭇 상징적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박수를 올렸다는 기록이 없다.

박수는 율법적으로 금할 성격도 아니지만 함부로 예배에서 자유자재로 할 성격의 것도 아니다. 경우에 맞게 쳐야 한다.

2007년 11월 28일 수요일

찬양과 음악의 잔치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송축합니다.


우리 삶에서 찬양과 음악을 빼 놓을 수가 없죠.


이 블로그를 만든 까닭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을 맘껏 찬양하고 노래하며 거룩하고 신선한 음악을 함께 즐기고.. 관련된 이야기들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열망합니다.